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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정문학촌은 강원도 춘천의 실레마을에 있다. 서울에서는 전철 7호선 상봉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1시간 30분 정도 달려가 김유정역에서 내리면 된다. 김유정역에서 3분 정도만 걸으면 김유정문학촌에 닿는다.



  1937년 만29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소설가 김유정을 만났다. 수학시간, 까까머리의 소년이 책상 아래 몰래 국어책을 펴놓고 읽던 소설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의 김유정문학촌에는 동백꽃1)인지, 점순이의 살내음인지 모를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가 배어 있을까. 동백꽃 같은 점순이의 살내음에 아찔했던 것은 소설 속의 ‘나’만 아니었다. 쓸데없이 쓸쓸해지던 사춘기, 수업시간에 몰래 읽으며 소설 속의 ‘점순이’와 함께 동백꽃 아래로 넘어지며 아찔했던 나는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다. 누군가 삶을 바꾼 한 권의 책을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서슴없이 김유정의 ‘동백꽃’을 들었다. 동백꽃의 그 알싸한 살내음이 글을 쓰게 했으니….


   …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 “그럼 어때?“ / 하고 일어나다가, / ”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 /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 ”그래“ /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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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역(金裕貞驛)은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경춘선의 철도역이다. 이 역은 수도권 전철역 중 유일하게
역 행선판이 궁서체인 역이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이름으로 역 이름이 된 곳이다.
건물은 영월역, 경주역과 동일하게 한옥 형태의 역사로 지어져 있다.
원래의 역명은 ‘신남역'이었으나, 소설가 김유정을 기념하기 위해 2004년 12월 1일에 역명을 변경했다.
오른쪽 아래는, 전철복선화가 되기 전의 간이역.



   1930년대의 소설가 김유정의 생가가 있는 실레마을은 마을 전체가 김유정문학촌이라 할 수 있다.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3분 정도만 걸으면 ‘김유정 생가’와 ‘김유정 기념 전시관’이 있고 맞은 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움막을 짓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던 야학터가 있다. 마을 가운데 잣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실존인물이었던 <봄․봄>의 봉필 영감이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소설 <봄․봄>에서 점순이와 혼인은 안 시켜주고 일만 부려먹는데 불만을 느낀 ‘나’가 봉필영감과 드잡이를 한다.


  …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싸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


-김유정의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조광, 1936년 5월호)



   봉필영감의 집 옆에는 김유정이 세운 간이학교 ‘금병의숙(金屛義熟)’이 있고, 건물 옆에는 김유정이 기념으로 세운 느티나무가 세월을 이기고 자랐다. 신동면사무소 뒤쪽 김유정이 토다리 찌개로 술을 마셨다는 주막터, 팔미천 건너 산골나그네 '들병이‘가 남편을 숨겨 두었던 물레방앗간 터도 있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산골>, <만무방>, <솥>, <가을> 등 소설 12편이 이곳 실레마을이 무대였으니, 점순이, 덕돌이, 덕만이, 뭉태, 춘호, 근식이 등 작품의 둥장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이 곳 실레마을이다. 김유정역에서 김유정 생가와 김유정기념전시관까지 약 300미터. 실레마을을 돌며 김유정의 소설 속 배경지를 찾아 돌면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1908년 1월 11일 ~ 1937년 3월 29일)은 이곳 실레마을에서 김춘식과 청송 심씨의 2남 6녀중 차남(일곱째)로 태어난다. 김유정은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김우명의 후손으로 그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이 김유정의 할아버지다. 아버지 김춘식은 자를 윤주(允周)라 했으며 진사시험에 합격해 사마좌임금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를 지냈다. 당시 실레 마을에 있던 50여호는 대부분이 김유정의 할아버지 김도사댁 소작인들이었다. 김유정은 춘천부내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자 세력가였던 김도사댁 귀염둥이 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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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김도사댁의 주소는 춘천부 남내이작면 427번지. 언덕 위 동남향의 30여칸 기와집이 김도사댁이었다.
그 자리에 김유정의 생가와 김유정 기념관이 있다.



  만석지기 지주집안이었고 서울에도 100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김유정이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는 아버지를 여읜 뒤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더욱이 집안을 책임지고 있던 큰형의 분방한 생활로 말미암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각별했던 어머니를 잃은 환경에서 김유정은 점차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말더듬이 증상을 보였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이 같은 언어장애 현상 속에 김유정 특유의 표현 의욕이 잠재해 있었을 것”이라며 작가의 심리적 특성을 말하기도 했다.

  김유정은 1929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지만 학교 결석이 잦아 두 달 만에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잦은 결석은 당대의 명창이었던 ‘박록주2)‘와의 짝사랑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박록주보다 3살 연하였던 김유정은 박록주를 광적으로 짝사랑했지만, 박록주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훗날 김유정은 소설 <두꺼비>와 <생의 반려>에서 박록주와 유사한 주인공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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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았던 작가의 생애와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는 김유정기념 전시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사진이김유정이 짝사랑했던 기생이자 명창이었던 박록주의 옛사진이다.
아래에는 시인 박용철의 누이동생 박봉자의 옛 사진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김유정의 간절한 구애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연과 학교에서의 제적…. 김유정은 1930년 학교가 없는 고향 실레마을에 내려와 금병의숙을 짓고 약 2년간 우리글을 가리치며 실연의 아픔을 달랜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온 김유정은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해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소설 <소낙비>, <중앙일보>에 소설 '노다지'가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구인회3) 회원으로 활동하고 30여 편의 소설을 쓰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지만 1937년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공장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누나에게 얹혀살다가 나이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김유정이 빼어난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결혼도 못하고 29세의 일기로 마친 생애는 불우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유정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박녹주에게 짝사랑을 바치기도 하고, 젖먹이 딸린 들병이를 따라다니는가 하면, 잡지에서 같은 글이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박용철의 누이동생인 박봉자에게 30통이 넘는 편지를 쓰고, 소설가 최정희 씨에게 호의를 느끼며 술과 방황의 날을 보냅니다.  …


  - 유인순 교수(강원대국여교육과)의 <김유정을 찾아가는 길>(23∼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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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전시관에 종이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는 김유정의 소설 <봄․봄>의 주인공 점순이와 나.
소설 <봄․봄>에서 언제 점순이와 혼인시켜 줄 것이냐는 ‘나’의 불만에
장인될 사람은 점순이 키가 자라면 혼인인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
점순이의 키를 가늠하고 있는 소설 속의 '나'.



  이렇듯 그의 생애는 불우했지만, 김유정은 ‘재미있게’ 소설을 써내려 간다. 과장적인 문체, 상소리, 속어, 사투리 등을 동원해 어리석은 듯 하면서도 순박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향토적 아름다움을 풍기면서 주인공의 행동만으로 웃음을 일으킨다. 소설 < 동백꽃>의 '나'와 ‘점순이’ 사이,  <봄봄>의 '나'와 ‘장인’ 사이에 분명히 갈등이 존재하고 있지만 김유정은 이들 사이의 갈등에 개입해 어느 한 쪽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대립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해학’4)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김유정이 현실의 모순이나 결함까지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춘천 MBC가 김유정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김유정은 명문집안의 자손인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존대말을 했다고 하니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곱다.


   ... 장인님! 인제 저……" /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 "이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 을 좀 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년이면 삼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 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 (중략)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중략)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루 밭머리에 곱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나기를 기다린다. /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 "그럼 어떡해?" / 하니까, /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

- 김유정의 단편소설 <봄․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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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생가에서 만났던 문(門). 대립이 많은 시대, 우리가 열고 들어가야 하는 문은,
대상을 항해 조롱하며 공격하는 풍자(諷刺)가 아니라 애정 있고 따뜻한 시선을 더하는 해학(諧謔)일지 모른다.



  경철선을 타고 남춘천역에 내리고, 전철 한 블록 사이 ‘멀면 얼마나 멀까’하고 어림짐작으로 김유정역까지 걸었던 길이 알고 보니 6Km나 되었다. 간혹 뿌리던 겨울비 사이를 2시간여 걸어가며 얻은 것은 어쩌면 김유정의 따뜻한 시선일지 모른다. 대립이 많은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상을 항해 조롱하며 공격하는 풍자(諷刺)가 아니라 애정 있고 따뜻한 시선을 더하는 해학(諧謔)이 아닐까.




註)  ..............................


  1)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꽃은 동백꽃이 아니라 봄에 가장 먼저 피어나는 생강나무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고 불렀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 ‘노란 동백꽃’이라고 쓰고 있다.

  2) 박록주(朴綠珠, 1905년 2월 28일~1979년 5월 26일)는 소리꾼이다. 본명은 명이(命伊), 호는 춘미(春眉)로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어났다. 녹주는 예명이다.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이다. 12세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박기홍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20여세 때 1900년대 초기의 명창으로 불리던 송만갑에게 사사했다. 협률사(協律社)에서 활약하다가 남원에 내려가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배웠고 김창환)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배웠다. 정정렬에게서 <춘향가>를 배웠다. 조선성악연구회·조선창극단·대한국악원 등 판소리계의 일선에서 활약하여 왔다. <흥보가>, <춘향가>에 장(長)하고 <춘향가>는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동편제의 꿋꿋한 창법을 간직하고 있다. 판소리 보존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28년부터 음반을 취입하여 판소리 음반을 많이 남겼다. 판소리, 창극 등에 능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판소리 교육과 보존에 힘을 쏟았다. 흥보가 및 춘향가의 판소리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서편제가 다수였던 판소리계에서 동편제의 국보적 존재로 많은 제자를 남겼다.

  3) 구인회(九人會)는 1933년 8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결성된 문학 문인 단체로, 1930년대를 풍미했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여 순수 문학 단체였다. 발기인은 이종명, 김유영이 맡았고,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등 9명이 창단 멤버다. 후에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입회한다. 1935년을 전후하여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게 되지만, 김유정, 김환태가 가입함으로서 구인회라는 명목에 걸맞게 9명의 회원수를 유지했다. 이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감각과 기교를 지닌 예술파·기교파의 작가·시인들이었다. 이효석, 이태준 등은 세련된 문장으로 우수한 단편소설을 다수 발표해 문장 면에서 한국 현대소설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었으며, 9인회의 중심인물인 이태준은 일련의 한국적인 애수(哀愁)와 정취가 담긴 단편소설을 발표해 대중의 각광을 받았다. 박태원은 예술파적인 경향의 작가, 이무영은 경향적인 작가로 출발해 농촌을 제재로 한 농촌소설을 썼다. 정지용의 감각적인 순수시, 김기림의 모더니즘시와 주지적인 이론, 이상의 신심리주의적인 작품, 김환태의 예술지상적인 평론, 김유정의 인생파(人生派)적인 소설 등은 모두 이 구인회의 순수문학적인 입장을 대변한 것들이었다.

 
4)  해학(諧謔). 사전적으로는 익살스러우면서 풍자적인 말이나 행동을 의미하지만, 해학과 풍자(諷刺)는 차이가 있다. 해학과 풍자는 모두 웃음과 관련된 미의식(골계미)이지만, 풍자가 대상에 대한 공격성이 있는 웃음이라면 해학은 대상에 대한 연민과 동정, 애정이 어린 웃음이다. <흥부전>에서 작가가 '놀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풍자다. 작가는 '놀부'보다 우월한 입장에 서서 그의 탐욕을 조롱한다. 반면 '흥부'를 바라보는 미의식은 '해학'이다. 작가는 '흥부'의 가난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바라본다. 문학에 있어서 해학이나 풍자와 같은 골계의 미의식은 1930년대 채만식과 김유정에 의해 발전적으로 계승된다. 채만식은 주로 대상을 비웃는 '풍자'의 방식을, 김유정은 대상의 어리석음에 동정심을 실어 주는 '해학'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김유정문학촌 웹페이지 바로가기(  http://www.kimyoujeong.org )



2011/12/08 13:42 2011/12/0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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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다산 유적지 / Photo by 이우




   교육이론서의 고전으로 많이 읽히고 있는 루소의 <에밀>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 모든 것은 선했지만 인간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은 타락한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이지만 문명화 된 사회 안에서 악에 물들었다는 기본적인 전제 위에서 루소는 자연상태와 같은 갓 태어난 어린이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어떻게 잘 유지할 것인가를 교육의 과제로 삼았다. 일반적으로 외면적 직업을 위한 훈련으로서만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대하여 루소는 인간이 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는 자연주의적인 교육을 최고의 교육적 이상으로 삼았다. 좋은 교육이란 어린이를 어떤 특별한 사회적인 조건하에서 양육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 따라서 모든 조건에 적합한 인간과 시민을 육성해내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루소의 교육론은 과거의 교육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루소는 자신의 입장이 타협과 조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독창적임을 의식하고 이전의 교육방법을 고수하던가 아니면 전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채택할 것을 권하였다. 루소가 교육의 영역에서 가져온 새로움이란 우선 유아기의 특수성과 가치의 재인식이다. 루소는 어린이를 더 이상 어른을 기준으로 하여 이해하지 않고 어른과는 차이나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어린이의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의 관찰을 중시하였다. 미완성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간주되던 유아기를 그 나름대로 완성된 삶의 형태로 본 것이다. 어린이가 자신의 유아기를 향유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국 행복과 그 조건이 되는 자유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론을 의미한다.

   이 때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자연을 뜻한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흐름을 유지하려면 오히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의 교육하지 않는 교육, 이른바 '소극적 교육'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교육이 아니라, 선하게 타고난 존재인 어린이에게 섣불리 교훈을 주고 미덕을 주입시키지 말고 단지 범할지도 모르는 실수와 악덕을 예방하고 장차 지식 습득을 위한 능력들을 완성하면서 자연적인 성장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유의 교육학은 자연적인 순서에 의해서 순차적으로 발달하는 인간능력들의 발달심리학에 의거하고 있다.  루소는 최초로 교육학을 심리학 위에 세움으로써 근대 교육학의 선구가 되었다.


     … 의존 상태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물에의 의존인데, 이것은 자연에 기인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인간에의 의존인데 이것은 사회에 기인하고 있다. 사물에의 의존은 하등의 교육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악을 낳는 일은 없었다. 인간에의 의존은 무질서한 것이어서 모든 악을 탄생시켜 지배자와 노예가 서로 상대방을 타락하게 만든다.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악에 대하여 저항하는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대신의 자리에 법을 놓고 일반 의지에다 현실적인 힘을 부여하여 그것을 개별 의지로 행하는 모든 일에 놓는 일일 것이다. 모든 국민의 법률이 자연의 법칙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는 불굴의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인간에의 의존이 사물에의 의존으로 바꿔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안에서 자연 상태에 있는 모든 이익이 사회 상태의 이익과 연결된다. 인간이 악에서부터 빠져 나오게 하는 자유의 인간이 미덕을 향해 올라가게 해주는 도덕성을 연결시키는 결과가 된다.

 아이를 오직 사물에의 의존상태에 머무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교육의 진행 과정이 자연의 질서를 뒤따르는 결과가 된다. 아이의 분별없는 의지에 대해선 물리적 장애만을 주는 것이 좋겠다. 혹은 행동 그 자체에서 생기는 벌만을 주는 것이 좋겠다. 나쁜 일을 하려는 것을 막거나 하지 말고 그것을 방해만 하면 된다. 갖고 싶어 한다고 줘선 안 된다. 필요할 때만 주어야 한다. 아이가 행동할 때 복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서는 안 된다. 아이는 자기의 행동에 있어서도 당신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자유를 느껴야 한다. 명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의 힘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모자랄 때에는 보충해 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의 협조를 겸허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그런 협조가 없이도 할 수 있는 때를,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때를 갈망하도록 해야 한다 …

- 루소, <에밀>중에서



    루소가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동시에 집필하고 출간하였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루소가 얼마나 정치적인 문제를 교육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루소에게서 교육학은 분명 정치학과 만난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정치적 이상의 실현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며 가장 잘 만들어진 법률이라 할지라도 개인 의지가 일반의지에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을 지배하려면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며, 자유시민의 교육에 관한 <에밀>은 정치이론서인 <사회계약론>을 보완하는 글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에밀>에는 <사회계약론>이 요약되어 있기도 하다.

    루소의 시대는 지배자 권력과 피지배자의 구속으로 유지되는 사회였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 상태에서는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자연 상태의 사회 질서는 만드는 일이다. 서로에 대한 의존 상태를 벗어나 보편적이며 영원한 자연권을 누리는 자유인이다. 이를 위해 지배와 의존의 인간관계를 대신하여 신의 듯에 의한 자연법을 확립하고 왕권의 횡포를 뜻하는 개별 의지를 배제하고 일반 의지를 세워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낡은 사회를 파괴하고 합리적 인간 이성이 공동체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를 보장하는 법칙이 자연 법칙이라면 공동체의 사회 질서는 바로 일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자연 상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이러한 루소의 사회학적 논의는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이에게 규제를 가하고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교육 기능이지 그것이 당시 어른들이 서로 상호 간에 맺고 있었던 지배와 복종의 원리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들에게도 필요했던 자유, 자연적 질서였던 것이다.  

    1762년 5월 말경에 출간된 <에밀>은 그해 6월초에 이미 소르본과 파리의회에 의해 금지되었고, 저자가 체포령을 피해 스위스로 도주해서 1766년 1월 영국으로 피신하기까지 했다. <에밀>은 루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규정한 작품으로서 그의 인간학으로부터 도출된 교육론 체계를 담고 있었다. 게다가 <에밀>에는 루소가 특별히 애착을 갖는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La profession de foi du vicaire savoyard>이 포함되어 있다. 이 텍스트에는 유물론 반박, 원죄설의 거부, 다양한 '역사적 종교'들을 넘어서 있는 순수한 '자연종교'에 대한 생각 등 루소 사상에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들이 담겨져 있다. 이렇게 종교철학적으로 볼 때 루소는 이신론자(理神論者)로서 '자연종교' 이외에 역사적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의식의 내면적 증거에 근거하는 동시에 이성과 합치하는 자연종교는 미묘한 신학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도덕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개의 큰 진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신조로 삼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고 보편적이다. 여기서 루소가 말하는 자연종교가 기본적으로 믿는 것은 ‘섭리하는 신의 존재’와 ‘영혼불멸’ 그리고 ‘의지의 자유’ 등이다. 바로 이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시각으로 인해 <에밀>은 금서가 되었다.


2011/12/03 11:32 2011/12/0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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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남이섬 / Photo by 이우




   법가(法家)는 실용적인 정치 철학으로 전국(戰國)시기에 형성되었다. 춘추(春秋) 후기에 노예의 끊임없는 폭동과 봉건 지주계급의 흥기로 인하여 기존의 노예주 귀족계급 통치를 유지하였던 "예치(禮治)"가 점차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유가의 "예치(禮治)"사상에 대립하여 각 제후국에서는 변법을 통하여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풍조가 출현하였다.


  전국(戰國) 초기에 위(魏)나라의 재상 이회(李悝 , 약 B455~BC395)는 ≪법경(法經)≫을 편찬하고 솔선하여 위(魏)나라에서 변법(變法)을 단행하였다. 계속하여 오기(吳起, BC 약 440 BC 381)는 초(楚)나라에서 법률을 개편하였다. 전국(戰國) 중기에 상앙(商鞅 , 약 BC390~BC338)은 진(秦)나라에서 변법(變法)을 실행하였다. 또 한(韓)나라의 신불해(申不害), 조(趙)나라의 신도(愼到) 등도 모두 자국에서 연이어 변법(變法)을 실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각국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치가들로 잔존해 있던 노예주 귀족계급의 정치 경제통치를 청산하고, 봉건적인 정치 경제제도를 확립 발전시키기 위해서, "변법(變法)"을 통하여 구귀족의 정치에 대한 전횡을 타파하고 관료정치로써 귀족정치를 대체하여 국가권력을 봉건군주에게 집중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걍력한 제도와 법령을 공포해서 전국의 모든 사상을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以法治國)"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강력하게 실행하였던 이러한 정치가들의 사상 이론과 실천은 각종 사조(思潮)가 격렬하게 경쟁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의 주장은 "법치(法治)"를 핵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법가(法家)"라고 일컬어진다.


  한비자는 신불해, 신도, 상앙 등의 초기 법가사상을 종합하여 "법치(法治)"를 중심으로 삼고 법(法), 세(勢), 술(術)이 서로 결합한 관점을 주장하였다. 한비는 "술"만 언급하고 "법"을 중시하지 않은 신불해와, "법"만 언급하고 "술"을 중시하지 않은 상앙의 사상은 모두 군주의 통치에 불리하므로 정확한 방법은 법, 술, 세 삼자를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비자는 먼저 정권의 천하통일에 유리한 준칙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法, 군주는 인민을 통제하는 공개적이고 자세한 규칙)"이었다. 그는 사회가 모두 반드시 "법"을 준수해야 하며 누구든지 "법"을 위반하면 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법령을 "명(名)"이라 하고 법령에 의거하여 상벌을 가하는 것을 "형(刑)"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형명지술(刑名之術)"이다.


  한비자는 또한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술(術, 신하들을 지배하는 은밀한 방식)"도 필요한데, "술"은 군주가 "법"에 의거하여 관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법"은 공개된 것이고 "술"은 은폐된 것이며 "술"이 있으면 국왕은 정권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법"과 "술" 외에도 한비는 "세(勢, 인민과 신하를 굴복시키는 힘)"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세(勢)"란 바로 정권이며 "승세(乘勢, 세를 타는 것)"는 바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는 신도의 "중세(重勢)"설을 수용하고 발전시켜 "세(勢)"를 "자연지세(自然之勢)"와 "인위지세(人爲之勢)"로 구분하고 "인위지세(人爲之勢)"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와 "법"을 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시대(BC 475~221)에 한비자(韓非子)의 영향을 받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BC 221~206)의 이념적 토대를 이루었다. 법가는 인간의 실제행동에 따라 정치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백성이 통치자의 미덕을 인정한다고 해서 사회적 화합이 보장되지는 않으며,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가는 특정한 행동에 대해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를 내세워 정부를 옹호했다. 또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1/11/28 13:02 2011/11/2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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