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view ]





사용·교환·기호, 그리고 상징의 경계를 걷다(2)

- 영덕 옹기전수관 · 진주 전수교육관 · 통영 공예전수교육관 -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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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권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조사를 마친 일행이 두 번째 탐방으로 가는 곳은 경북 영덕과 경남 진주 · 통영에 있는 무형문화재 전수관이다. 서울을 떠난 지 다섯 시간. 영덕으로 가는 34번 국도에서 기인을 만났다. 잠시 들른 청송 야송미술관에서 지역출신 한국화가로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냈던 한국화가 야송(野松) 이원좌(李元佐) 화백을 만난 것이다.

야송 이원좌 화백을 만나다

     야송미술관은 이원좌 화백이 소장하고 있던 한국화 및 도예작품 등 350점, 국내외 유명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 50여점, 미술관련 서적 1만여 점을 기증받아 2005년 청송군에서 지은 군립미술관이다. 미술관 1층 전시장에는 무토(撫土) 전성근 도예가의 이중투각 백자전이 열리고 있었다. 무토(撫土)라면 ‘흙을 어루만진다’는 뜻. 그가 흙을 만지면, 이중투각 백자가 나온다. 이중투각 도예는 속항아리와 겉항아리 두 개를 만들어 붙이고 겉항아리를 조각을 해 속항아리가 보이게 하는 도예기법. 많은 공을 들여 투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마에서 구울 때 수축률이 맞지 않아 터지는 일이 많은 까다로운 기법이다. 장인이 흙이 가지는 미세한 결 특성을 읽어낼 수 있어야 완성할 수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동백문이중투각호, 칠보이중투각호 등 약 50점의 백자. 투각되어 겉을 둘러싼 항아리가 속항아리를 내비치듯 우리 마음도 성글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행은 이중투각 백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행이 미술관 2층에 올랐다가 상설 전시된 야송(野松) 이원좌(李元佐) 화백의 산수화에 넋을 놓았다. 벽면 하나를 완전히 장악해버린 청량대운도(淸凉大雲圖). 이 산수화의 크기는 높이 6.8미터, 길이 48미터로 현존하는 동양화로는 세계 최대다. 일행들이 마치 산수화 안에 있는 듯 했다. ‘청량대운도’는 봉화 청량산의 열두 봉우리를 모습을 이원좌 화백이 1991년부터 1년여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다. 크거나 작거나 전시되고 있는 이원좌 화백의 산수화에는 모두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봉우리가 있으며 물이 있었다. 봉우리에는 구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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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주왕산 언저리 34번 국도변 청송 야송미술관
    ② 폐교를 이용해 지은 미술관 한 켠에 연꽃이 피었다.
    ③ 무토(撫土) 전성근의 이중투각백자
    ④ 야송(野松) 이원좌화백
    ⑤ 이원좌 화백이 그린 청량대운도와 무릉화운도
    ⑥ 이원좌 화백의 그림에는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산이 있다.


    젊은 시절, 이원좌 화백은 그림이 좋아 나를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아내에게는 남편, 애들에게는 아버지일 텐데 이들을 버려두고 산과 나무, 구름을 따라 물처럼, 바람처럼 흘렀다. 애를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입학금이 없다는 아내의 울먹임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돈이 필요할 때면 그림을 알아주는 이름 모를 지인들이 딱 그만큼의 돈을 내놓고 가져가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웃는 이원좌 화백은 어쩔 수 없는 그림쟁이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로 보드리야르가 사용, 교환, 기호, 상징이라고 사물의 가치를 이렇게 정의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산이 없고 구름이 없고 물이 없으며 바람이 없다. 그래서 사람도 없다. 그의 그림 안에는 산이 있고 구름이 있으며 물이 있었고, 사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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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덕은 물과 산, 그리고 바람의 고장이다. 영덕 옹기전수교육관은 마을과 함께 있고 교육관에 숙박시설이 없어 불편하지만 차로 10여분이면 바닷가에 닿을 수 있어 좋다.




옹기장이 백광훈(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 기능보유자)

      영덕은 물과 산, 그리고 바람의 고장이다. 이곳에서 물은 대게와 은어를 기르고 산은 송이를 기르며 바람은 전국 최대 크기의 풍력발전기를 돌린다. 산은 흙을 품었고 사람은 흙을 만지며 옹기를 만들었다. 옹기전수관이 있는 경북 영덕군 지품면 오천리는 산과 물이 좋아 예로부터 약 16개의 옹기 공장이 있었고 사람들은 ‘옹기마을’이라고 불렀다.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그 많던 옹기공장이 없어지고 이제 옹기를 만드는 사람이 백광훈 옹기장뿐이지만 올 3월 옹기전수관이 마을 한가운데 들어섰다.

    옹기는 흙을 떠나지 못한다. 흙을 떠나지 못해 전수교육관은 원래 가마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올 3월에 개관한 이 전수관은 1,367㎡의 부지에 연면적 328㎡의 단층 건물로 작업장과 옹기 제작기술 전승보존을 위한 전수교육관, 작품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청소년들에게 전통옹기의 우수성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교육장을 갖추고 있다. 도로를 벗어나 마을과 과수원을 지나야 하지만 그 덕분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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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옹기를 닮은 경북 영덕 옹기전수교육관.
    ② 옹기장이 백광훈(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
    ③ 건조실에서 옹기가 말라가고 있다.
    ④ 영덕은 예로부터 옹기의 고장. 항아리에 <영덕옹기>라는 생산자 표시가 보인다.
    ⑤ 작업실. 옹기 만들기는 무게와 크기의 싸움이다.
    ⑥ 옹기 가마. 13통 가마로 한 번에 약 3천개 정도의 옹기가 들어간다.


    옹기는 흙을 닮아 질박하다. 옹기와 도자 모두 흙에서 나왔지만 옹기가 더 흙과 가깝다. 도자가 세련미를 갖춘 도시적인 느낌이라면 옹기는 질박한 산촌이나 농촌의 느낌이다. 도자가 아기자기하다면 옹기는 넉넉하고, 도자가 작고 가볍다면 옹기는 크고 무겁다. 좁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도시적인 주거공간이 확대되고 있지만 가볍고 작은 도자보다는 무겁고 투박한 옹기가 더 사용가치를 획득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덕택에 4대째 옹기를 만들며 살고 있는 옹기장 백광훈은 스스로 ‘돈은 벌 만큼 벌었다’고 대놓고 말했다. 옹기를 만들며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전통공예품이 사용가치를 잃어가고 있는데 옹기는 아직 사용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사용가치가 있으려면 우수한 도구적 기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에는 유약이 사용되지만 옹기는 나뭇재와 약초를 섞어 비율을 맞춘 잿물을 사용한다. 자기에 사용하는 유약은 구조가 촘촘해 공기가 통과하지 못하는 반면에 옹기는 물 분자를 차단하고 공기 분자를 통과시킬 정도로 성글다. 이 때문에 옹기는 숨을 쉰다. 옹기 안에 음식을 넣으면 잘 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이로울 만큼 잘 숙성되어 김치와 장류 등의 보관용기로는 최적이다. 이 기능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최근에는 과일이나 약초 보관용기로 그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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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체험실. 옹기 체험은 인기가 좋은 편이다.
    ② 교육장. 프레젠테이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③ 체험자들이 만든 작품들. 항아리도 있고 첨성대도 있다.
    ④ 전수교육관 한 켠에서 여름비를 맞고 있는 옹기.
    ⑤ 물레 위에서 말라가고 있는 체험자들의 작품.
    ⑥ 옹기 위에 빗물이 고여 있다.


    질박하고 소박해 편안해 보이는 옹기의 질감도 그 가치를 높이는데 한몫 했다. 옹기의 소박한 형태와 질감은 전통 가옥이나 도시형 구조의 집 어디에 놓아도 어울리는 우리 전통의 미학이다. 이 점에서 특히 옹기장이 백광훈은 영덕의 옹기를 사랑한다. 호남지방의 옹기가 흙을 말라 올리며 붙이는 방식이라면 영남지방의 옹기는 엇갈려 빗는 옹기. 호남지방의 옹기가 아래 부분이 큰 데 비하여 영남지방의 옹기는 세운 달걀의 위부분과 아래 부분을 잘라낸 듯한 이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 예쁘다.

    투박하고 소박한 질감의 옹기지만 무겁고 크다보니 옹기 제작은 무게와 크기와의 싸움이다. 사용되는 흙의 양이 많아 흙 작업을 할 때면 이웃 주민, 사위와 딸 모두 모여서 작업을 하고, 물레질을 마친 독을 들어낼 때에도 혼자서는 힘들다. 크고 무겁다 보니 엉덩이 살이 헐 정도로 물레를 돌려야 한다. 백광훈 옹기장이 보유하고 있는 가마는 전통식 가마와 개량 가마. 가마 크기도 도자기 가마보다 훨씬 크다. 13통으로 이뤄진 한 가마에 약 3천개 정도의 옹기가 들어가고 불을 넣으면 한 번에 약 보름 동안 불을 때야 한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흙일과 물레질을 해 항아리를 만들어 잘 말려두었다가 일 년에 한 번(10월말에서 11월말) 불을 넣는다. 가마는 가마 칸마다 균일하게 온도를 높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불꽃이 적고 숯이 오래가는 참나무보다 일시에 불꽃이 일고 일시에 삭는 소나무가 땔감으로 제격이다. 삶이 불꽃이라면, 소나무처럼 살다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경북 영덕에 있는 옹기전수교육관은 마을과 함께 있고 전수교육관에 숙박시설이 없어 불편하지만 차로 10여분이면 영덕 해맞이공원이나 강구항 등 동해안에 닿을 수 있어 좋다. 마을 전체를 옹기마을로 특화해 옹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전수관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일행은 진주로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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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진양호의 아침. 자리공이 꽃을 피우고 있다.
    ② 모를 생명이 생명을 기른다. 갈대 줄기를 둥글게 말아 만든 곤충의 알집.
    ③ 진양호에서 아침을 맞고 있는 해오라기



장도장1) 임장식 (장도 기능보유 후보자)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은 장도장과 두석장을 만나기 위해 진주 전수교육관으로 향했다. 일행이 머물렀던 물사랑 농촌체험농장 옆 진양호는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아직 물안개를 머금고 있다. 새벽녘 걸었던 진양호 언저리에는 이름 모를 생명이 갈대 줄기를 둥글게 말아 알집을 만들어 놓았고 해오라기는 연신 고개를 물 속으로 밀어넣으며 모이를 찾았다. 삶이란 생존을 위해 자연을 극복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인가. 문화를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체계’라고 했던 인류학자 B.J 매거스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하여 환경에 적응’해야 하며 ‘생물을 지배하는 자연선택법칙에 의해 규제된다’고 말했다.

    인간이 자연을 적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는 ‘칼’이었다. 칼은 신체적으로 방어 체계를 갖추지 못한 인간이 맹수의 튼튼한 발톱과 이빨을 모방하여 만들어낸 도구. 사용하기 싫지만 사용해야 하는 것. 혹은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용가치로 본다면 칼은 장식될 필요가 없다. 사냥을 위해 사용하는 칼이 아름다우면 어떻고 아름답지 않으면 어떤가. 기능을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칼은 사용가치 중심의 도구인것이다. 그러나 장도(粧刀)는 말 그대로 ‘장식한 칼’. 칼이 장식된다는 것은 기호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다. 칼이 장식되면, 소유한 사람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거나 사회적인 신분을 알려주는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장도의 역사는 길다. 신석기시대부터 석도를 장신구로 차고 다녔고 고구려인들은 주로 신분의 표시로 장도를 패용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뿐만 성인에 이른 남녀노소 누구나 장도를 패용해 장도의 사용가치나 기호가치 모두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용가치나 기호가치가 높지 않다. 이미 질 좋고 보기 좋은 현대식 칼이 실생활을 장악하고 있으며 장도를 신분이나 미적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패용하는 사람은 없다. 임장식 장도장 후보는 장도가 조선시대처럼 실생활에서 사용되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장용으로만 구매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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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도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은장도. 임장식 기능보유자 후보는 전통조각기법인 쪼이질 기법을 고집한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넣기 위해 모이를 쪼듯 작은 정으로 수없이 두드린다.


    현대에 와서 장도의 사용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징가치는 높은 편이다. 장도찾는 사람이 많아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고 단기강습생 공고를 내면 하루 만에 마감된다. 그렇다면 장도의 가치는 과거 사용‧기호 중심에서 상징중심으로 성공적으로 이동시킨 전통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진주공예전수관에는 전수교육반(매주 수요일과 목요일)과 단기강습반(월요일과 화요일) 4개반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장도 교육은 일대일 교육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없고, 전수관도 건축 당시 기능 전수라는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게 지어져 일반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현재 50여명의 교육생을 지도하기에도 공간은 비좁고 전수자는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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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고 임차출 옹의 뒤를 잇고 있는 그의 아들 임장식 기능보유 후보자.
    ② 그가 만들던 은장도가 작업대 위에 놓여 있다.
    ③ 화로. 전통 그대로 임장식 기능보유 후보자는 풀무질을 해 도신을 벼른다.
    ④ 손때가 묻은 그의 도구들.
    ⑤ 도가니. 은을 녹여 은괴를 만들고 두드려 얇게 펴낸다.
    ⑥ 모루. 전통 그대로 새가 모이를 쪼듯 작은 정으로 수없이 두드려 장식을 한다.


    진주의 전수교육관에는 아버지 고 임차출(林且出·76) 옹의 뒤를 이어 아들 임장식 전승자가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 고 임차출 옹은 50여년의 세월을 은장도와 함께 살아온 장인으로 장도의 명산지인 울산 병영 출신이다. 형인 장도장 임인출(林仁出) 씨의 공방에서 어릴 때부터 기능을 익힌 임옹은 울산 병영에서 장도를 제작하다가 1969년 진주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장인의 길로 들어섰다. 임차출 옹은 장도의 도신을 벼르는 기법과 전통적인 문양을 은으로 조각하는 솜씨가 뛰어난 장도 기능 전승자였다. 임차출 옹이 타계하고 임차출 옹 곁에서 장도를 배우고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장인으로의 길을 걸었던 아들 임장식이 지난 2001년 기능 보유자 후보가 되어 맥을 잇고 있다.

    임장식 후보는 ‘실용가치가 없는 전통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것은 배고픈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옛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만드는 작품은 40여 종. 하루에 한 개 정도를 만들 수 있지만 일주일 정도 걸리는 것도 있으며 대작은 1년 넘게 걸린다. 기계로 찍어낸다면 몇 분이면 되겠지만 임 후보는 부친으로부터 배운 전통방식 그대로 칼을 만든다. 전통방식인 풀무작업으로 칼날을 세우고 문양 장식도 전통조각기법인 쪼이질 기법을 고집한다. 칼자루와 칼집에 문양을 넣을 때 주로 조각 칼로 파내는 기법을 사용하면 되지만 임 후보는 새가 모이를 쪼듯 작은 정으로 수없이 두드린다. 사람은 누구나 칼에 대한 로망이 있다고 했던가. 칼이면서도 아름다운 장신구인 은장도를 앞에 두고 일행은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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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석장 정한열(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이 두석 공예. 일행이 만나지는 못 했지만 진주 전수교육관에는 두석장이 입주해 있다. 두석(豆錫)이란 주석(朱錫), 방자 백동(白銅) 등의 합금 금속을 말하며 두석장(豆錫匠)은 두석을 공예품을 만드는 기능인을 말한다.



통영 12공방2)

    진주에서 한 시간여 달려 일행은 한국의 나폴리 통영에 닿았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칭답게 산과 바다가 가파르게 만나는 풍경이 아름답다. 통영은 소설가 박경리와 시인 유치환, 시인 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등 예술인들을 길러낸 예술의 도시이며 조선시대 최고의 공예품을 만들던 통영 12공방이 있던 전통공예품의 산실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통영에는 빼어난 솜씨를 갖춘 장인들이 모여들었고, 이들 장인의 본거지가 12공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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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이 통영(統營)이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칭답게 풍경이 아름답다. 소설가 박경리와 시인 유치환, 시인 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등 예술인들을 길러낸 예술의 도시이며 조선시대 최고의 공예품을 만들던 통영 12공방이 있던 전통공예품의 산실이기도 하다.


염장3) 조대용(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 기능보유자)
 
    통영 전통공예전수관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영시 무전동에 있다. 다른 전수교육관에 비해 시설이 좋지 못하고 주택지에 위치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 전수관은 조대용 염장(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과 송방웅 나전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두석장 김극천(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과 김금철 소목장 전수 조교(무형문화재 제55호)가 입주하고 있다.

    염장(簾匠)이란 발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발은 햇볕을 가린다는 점에서 커튼과 비슷하지만 바람이 통하고 밖을 내다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조대용 염장은 아버지에게 배워 발을 엮기 시작했다. 무과 급제 했던 그의 증조부가 손수 발을 엮어 철종 왕에게 진상하여 치하를 받았던 내력이 있을 정도로 대대로 염장일을 해온 집안이다. 지금 조대용 염장은 내년 완성 예정으로 서울 종묘에서 사용할 대발을 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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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통영 전통공예전수교육관. 염장, 나전장, 두석장, 소목장이 입주해 있다.
    ② 염장 조대용(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 기능보유자)
    ③ 일행들이 조대용 염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④ 손으로 날줄 하나하나를 일일이 서로 비껴 역어 만드는 통영대발.
    ⑤ 날줄을 교차해 그려내는 귀문(龜文).
    ⑥ 통영대발. 생활공간이 급격하게 서양화되면서 발이 커튼으로 대치되었다.


     통영 대발은 시릿대를 사용한다. 시릿대는 왕대보다 질기고 부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마디가 매끈하고 섬유질이 가늘어 발을 엮어 놓고 보면 마디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대용 명장은 변형을 막기 위해 겨울에 시릿대를 채취해 놓았다가 일년내내 사용한다. 통영 대발은 실을 꼬아 문양을 넣는데 문양의 모양에 따라 귀문렴(龜文簾)과 고문렴(苦文簾)으로 나눈다. 이 작업은 날줄 하나하나를 일일이 서로 비껴 엮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발이라고 하더라도 귀문령은 1개월, 고문령은 2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힘든 일이다.

     발은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발달한 문화였지만 최근 생활공간이 급격하게 서구화되면서 발이 커튼으로 대치되었다. 사용가치가 떨어졌다면 상징가치라도 높아야 할 텐데 발은 아직 그 위상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조대용 염장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만큼 문화가치가 높은 왕릉의 정자각에 분명 발을 걸었던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달지 않았다’며 사람들의 무관심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대용 명장은 전통 명품이 현대적인 디자인과 만나 모던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으로 이뤄낸 성과가 조각보를 이용한 발. 이 발은 조각보를 만드는 침선장과 발을 만드는 염장이 만나 새로운 미학을 만들 수 있다는 모델이 되었고, 전통공예품이 디자인을 만나 기호가치와 상징가치를 획득하고 나아가 사용가치 또한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전통의 발과 전통의 조각보가 만나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한 발을 보며 일행은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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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발의 윗부분. 침선장이 조각보 디자인으로 침선했다.
   ② 조각보를 만드는 침선장과 발을 만드는 염장이 힘을 더해 만든 발.
   ③ 발의 중간부분. 전통적인 통영대발(귀문렴, 龜文簾).


나전장4) 송방웅(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기능보유자)

     열아홉 청년이 장인이던 아버지의 권유로 나전에 입문하고 10년간 두문불출하며 기술을 연마하고 또 10년간을 전통 나전 작품들을 연구한 끝에 1980년대 이후 한국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으로 자리 잡은 사람, 그가 나전장 송방웅이다. 나전칠기 기법은 자개를 문양대로 통으로 오려내는 ‘줄음질’과 얇게 썰어내어 조각조각 이어서 문양을 완성하는 ‘끊음질’이 있는데 송방웅 나전장은 작업하기 힘든 끊음질 기법만을 고집한다. 이 기법이 전통의 기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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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나전장 송방웅(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기능보유자)
    ② 송방웅 나전장의 설명을 듣는 일행
    ③ 끊음질을 위해 준비된 자개. ‘끊음질’은 자개를 거도(칼)로 짧게 잘라 조각(Chip)을 만들고 이 조각을 문양대로 모자이크하듯 붙여 만든다 .
    ④, ⑤ 끊음질로 만든 나전칠기.


    토태(실톱)가 나전 작업에 등장한 것은 1910년대. 토태가 나오면서 자개를 문양대로 잘라낼 수 있었지만 이전에는 토태가 없었기 때문에 ‘끊음질’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끊음질’은 자개를 거도(칼)로 짧게 잘라 조각(Chip)을 만들고 이 조각을 문양대로 모자이크하듯 붙여 만든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만큼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간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인지 송방웅 나전장은 나전칠기가 ‘팔려나가면 기쁘기보다 아쉽다’.

     만약 송방웅 나전장이 나전칠기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 효율과 경제성이라는 현대적인 생산 원칙에 충실하다면 비교적 작업이 쉬운 ‘줄음질’을 선택했을 것이다. 왜 그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버려두고 비효율적이고 경제적이지 않은 ‘끊음질’을 고집하는 것일까.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 있지만 원칙과 전통을 고수하는 것, 이것은 이 시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김금철 소목장5) (무형문화재 제55호 전수 조교)

     통영 전통공예전수관에는 효율이라는 경제 원리를 따르지 않는 장인이 또 있다. 김금철 소목장 전수 조교다. 소목(小木)이란 대목(大木)에 상대되는 말로 대목장이 건축이나 공정 감리를 하는 데 비해 소목장은 집안에 쓰이는 장롱이나 궤, 책상, 탁자, 문갑 등 각종 목재 가구를 제작하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 전통의 목가구는 못이나 나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야말로 짜맞추어낸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해가름장맞춤, 갈퀴맞춤, 겹주먹장이음, 나비장이음 등 정교한 이음과 맞춤 작업이 필요하다. 경제적이지 않지만 못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맞추어 놓으면 못을 사용할 때보다 인장강도가 세배나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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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김금철 소목장 전수 조교
    ② 나뭇결이 보이는 바탕면을 감싸고 있는 검은 선은 붓으로 그은 것이 아니라, 흑단과 느티나무, 대나무를 얇게 짜맞추어 넣은 것이다.
    ③~⑤ 소복장이 사용하는 각종 공구들.


    또 선 하나를 넣을 때에도 그려 넣지 않고 나무가 갖고 있는 문양과 색깔을 오묘하게 조화시키고 정교하게 짜맞춘다. 느티나무 나뭇결 무늬를 바탕으로 해서 황색은 옻나무로, 흑색은 감나무 흑심을 얇게 잘라내고 붙여 마치 붓으로 선을 그린 듯 정교하게 기물을 만든다. 10년 정도 건조된 나무를 사용하고 대나무, 배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목단 등 나무의 특성을 모두 익혀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소목은 우리나라 전통공예 중에서 공정이 까다롭고 어렵기로 손꼽히는 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작업하다보니 아무리 작은 목가구라도 나무 작업에서부터 완성까지 최소 5개월이 필요하다. 그래서 소목장에게 정성과 부지런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김금철 소목장 전수 조교는 당대 최고 소목장 아래에서 16세부터 소목 일을 배웠다. 톱질을 잘 못했을 때 떨어지는 선생님의 호된 꾸지람이 무섭고 힘들었던 소년이 어느덧 40년 경력 소목장이 되었지만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목리를 살려내는 작품들에 매료되어 아직도 일을 배우던 그때처럼 매일 이른 아침 일을 시작한다.


다시 경계에서

    전통방식 그대로 풀무작업으로 칼날을 세우고 전통조각기법으로 새가 모이를 쪼듯 작은 정으로 수없이 칼을 두드리는 임장식 장도장, 편한 방법을 버려두고 전통을 고집하며 자개를 칼로 짧게 잘라 조각을 만들고 모자이크하듯 문양대로 붙여내는 나전장 송방웅,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정교한 이음과 맞춤 작업을 하는 김금철 소목장…. 이들을 뒤로 하고 일행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가 걸었던 길은 사용과 교환, 기호라는 상품가치를 중요시하는 현대와 상징을 중요시하는 전통 사이의 경계선. 느림보다는 빠름, 땀과 정성보다는 효율, 작품성보다 경제성을 추구하는 사용과 교환․기호가치 중심의 이 시대에 왜 이들은 비효율성과 비경제성, 불편함을 인내하고 있을까, 이들의 고집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이 시대는 그 가치를 알아줄까를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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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문화재청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진행하고 있는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활성화 컨설팅> 일환으로 무형문화제 전수교육관을 둘러보고 쓴 탐방기입니다.


   

미주 -------

1) 장도장(粧刀匠) :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인 장도의 제작을 담당하던 기능인을 말한다. 장도는 평복에 차는 작은 칼로서, 소도(小刀)·패도(佩刀)·낭도(囊刀)라고도 하는데, 호신과 장신구 겸용으로 사용하는 전통이 오래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손칼로서의 실질적 기능보다는 상징성과 장식성이 강조되어 여인들의 노리개장식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정교하고 화려한 치장의 장도가 다채롭게 제작되었다. 종류는 겉모양에 따라 첨사도·네모도·을자도(乙字刀)·을자맞배기·평맞배기 등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을자도 계통이 가장 일반적이다. 칼자루와 칼집의 표면을 은으로 장식한 것은 은장도, 산호를 이용한 것은 산호장도라 하며, 일반적으로는 먹감나무·대추나무·화류목 등 목재나 쇠뼈를 쓴다. 원래 하나의 장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소자장(小子匠)·소목장·조각장·백동장(白銅匠) 등으로 분업화된 장인들의 작업을 거쳤는데 현재는 한사람의 장도장이 칼날부터 장식까지 일괄 제작하고 있다.

 2) 통영 12공방 : 통영시의 대표적 12가지 전통공예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공예품 명칭이 통영 12공방(craft 12)이다. 조선시대 수군 총사령부였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통영에는 통제영에 신발과 망건, 활, 화살촉, 갓, 가구, 금은제품 등 각종 군수품과 공예품을 공급하던 12공방이 있었다. 구한말 통제영은 폐영됐지만 12공방의 맥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나전칠기(송방웅), 두석장(김극천), 소목장(김금철), 대나무발(조대용) 등 명인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3) 염장(簾匠) : 발을 만드는 기능인을 말한다. 발은 여름에는 창문이나 대청에 쳐서 햇볕을 막고 바람을 통하게 하기 위해, 겨울에는 한풍(寒風)을 막기 위해 치는 생활용품이다. 발의 쓰임새는 다양하여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거나 땅에 펴서 농작물을 말리기도 하고, 궁내에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에 이용될 만큼 독특한 데가 있다. 햇볕을 가리는 데 쓰는 발은 갈대나 대오리를 삼끈이나 실로 엮어 만든다.


 4) 나전장(螺鈿匠) : 옻칠한 기물의 바탕에 자개를 박아 붙여 장식하는 기능인을 말한다. 원래 자개를 박는 나전장과 옻칠을 맡은 칠장이 각기 분업화되어 있었지만 옻칠의 사용이 점차 적어지자 칠장의 존재는 나전장 기능 속에 흡수되었다.


 5) 소목장(小木匠) : 목제 세간을 만드는 기능인을 말한다. 주로 장롱·궤함·문방구 등 세간들과 가마·수레·농기구 등의 도구류를 만든다. 건축 분야에서는 창호·난간·닫집 등 건물에 부착되는 작은 시설물 제작이 소목장의 역할이었다.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조각장·나전장과 더불어 중상서(中尙署)에 예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에는 일괄하여 목장(木匠)이라 하였는데, 대신 세분화한 수레장[車匠(거장)]·선장(船匠)·통장(桶匠)·표통장(表筒匠)·마조장(磨造匠)·풍물장(風物匠)·안자장(鞍子匠)·목소장(木梳匠)·목영장(木櫻匠)을 따로 두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에 쓰이기 위해 제작되었으나, 후기에 들어와서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고 종류도 늘어나 지역적 특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2010/07/27 16:22 2010/07/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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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사용·교환·기호, 그리고 상징의 경계를 걷다(1)

- 강원도 원주 나전칠기 공방 · 횡성 도자전수교육관 -


 

이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 흙과 물, 바람과 나무의 미메시스(mimesis)를 섞어 전혀 경제성이 없는 전통 기법으로 만든 나전칠기가 있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우리나라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보유자이고, 그의 기능을 보전하고 전수하기 위해 국가는 전수교육관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반인은 전수교육관을 모르고, 기능보유자는 ‘살기 힘들다’. 욕망의 집어등처럼 ‘돈’을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우리에게 무형문화재와 전통공예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일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공예부문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활성화를 위해 길 나서는 일행의 고민이다.


나전장1) 이형만(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기능보유자)

     강원도 횡성의 도자전수교육관으로 가기 전 들렀던 원주의 이형만 나전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의 공방 역시 ‘생활’의 한가운데 있었다. 일하고 밥 먹고 자는 일상의 한가운데 걸린 ‘전통공예연구소’라는 간판이 설렁하다. 나전칠기를 경제적 가치로만 바라본다면 그는 일을 그만두어야 옳다. 이형만 나전장은 ‘좋은 나전칠기를 만드는데 기쁨을 느껴 일을 하고 있지만, 생활이 안 되니 답답'하다.마음을 바꾸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의 아들은 전수 포기 선언을 하기도 했다. “실생활에 널리 쓰일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일행의 물음에 이형만 나전장은 고개를 젓는다. 생활을 이유로 작품성 없는 상품을 무작정 많이 내놓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생활에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나전칠기를 저렴하게 내놓을 수도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장인의 정신과 혼이 깃들지 않은 나전이 어떻게 가치를 갖겠냐는 것이다. 이형만 나전장, 이 땅의 많은 예술인들과 장인들이 그렇듯 그도 ‘경계인(境界人)’이다. 그가 가진 기술은 무형(無形)이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나전칠기라는 유형(有形)의 물상이다. 무형의 기술은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유형의 나전제품은‘팔' 수 있지만 시장은 이미 저렴하면서 품질 좋은 현대적인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경계선에 서서 이 땅의 장인들이 서성이고 있다.

(c)Copyright by Mudbull

    ① 이형만 나전장(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② 일행에게 나전칠기 제작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이형만 나전장
    ③ 그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공구들.
    ④ 나전 도안을 조개껍질에 붙이거나 떼어낼 때 사용하는 인두
    ⑤ 나전을 붙이는 아교가 중탕되어 이형만 나전장 옆에 놓여 있다.
    ⑥ 패각을 다듬는 이형만 나전장의 작업대. 실톱이 가지런하다.



     그의 서재에는 그가 직접 그린 400여점의 문양이 보관되어 있다. 이 문양이 나전일의 출발점이다.  이 문양을 전복껍질 위에 붙이고 문양대로 얇게 썰어내면서 일이 시작된다. 썰어낸 패각을 아교로 원하는 위치에 붙이고 그 위에 옻칠을 해 잘 말린 다음, 사포로 옻칠을 걷어내면 마침내 나전이 그 화려한 빛을 드러낸다. 전복껍질을 사들이는 일에서부터 모양을 그리고, 깎고, 다듬고, 칠하는 등 약 45여개 공정을 거쳐야 나전칠기가 나온다. 아무리 작은 나전이라고 하더라도 6개월은 걸린다고 하니 현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경제성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자연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지금은 재료 구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제주와 통영을 중심으로 전복껍질이 나왔지만 예전과 달리 현재 국내산을 거의 사용할 수가 없다. 환경이 오염되고 먹거리로 무차별 채취되다 보니 두께가 얇아 나전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나전을 위한 대부분의 전복은 동남아시아나 뉴질랜드 등에서 들여온다. 이형만 나전장은 국내산보다 빛이 좋지 않아 늘 마음에 걸린다.

     나전칠기는 조개껍질을 다듬어 장식하는 나전과 옻칠을 하는 칠 기술이더해 만들어지는 생활용품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집은 인상적이다. 방마다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나전이 화려한 빛을 자랑하고 있고, 입식의 현대성 주방은 나전과 옻칠이라는 전통기법이 만나 은은한 붉은 빛을 뛴다. 이 주색(朱色)은 강렬하지 않아 불편하지 않고 자연의 색이라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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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패각에 도안을 붙인다
    ② 도안대로 패각을 잘라 나무에 붙이고, 옻칠을 한다.
    ③, ④ 잘 말린 뒤 사포로 문질러 낸다.
    ⑤ 서서히 드러나는 나전의 빛깔
    ⑥ 완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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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② 나전장의 안방에 놓인 나전칠기 화장대과 나전장
    ③, ⑤ 일상적인 생활 소품에도 나전이 화려한 빛을 드러낸다.
    ④ 옻칠을 한 주방, 전통과 현대가 공존한다.
    ⑥ 이형만 나전장의 서재.



최종호 교수와 함께한 화두(話頭), ‘가능할까’

     공예부문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만든 유형물인 전통 공예를 시장에서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무형의 전통 기법 보존(conservation)과 계승은 그리 힘들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할까?’ 일행은 이 물음을 앞에 두고 2009년 한국무형문화재 실태 조사를 했던 한국전통문화학교 최종호 교수와 밤늦도록 마주 앉아 있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보호의 법적인 문제에서부터 국제 기준 등을 브리핑한 최종호 교수는 세계 무형문화유산 선정의 네 가지 요소인 재질·디자인·기법·장소, 우리나라의 문화재 기준인 역사·학술·예술·경관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현재 우리나라 전수교육관 운영의 문제점을 브리핑했다. 그는 대도시에 위치한 전수교육관과 타 지역에 위치한 전수교육관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전하고 공예기술 분야의 전수교육의 경우 ‘전수 교육의 활성화’, ‘사회 교육의 활성화’, ‘시설물 관리 활성화’, ‘재정확보 방안 수립’ 등을 선결과제로 꼽았다. 특히,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중요무형문화재공예작품 유통센터(가칭)’를 건립하여 유통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일행은, 전수교육관 시설물 관리에서부터 보수, 기능 전수자 공예품의 마케팅과 상품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의 기법과 기록 방법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공간이라는 시설과 환경, 전수교육관 운영 프로그램, 공예품의 마케팅과 상품화 전략, 그리고 나아가 무형문화재 기능인의 기록을 남기는 일…. 무형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유형의 전통공예품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겠다는 것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갑론을박(甲論乙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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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욕망의 집어등처럼 ‘돈’을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돈’에 명멸되어 있는 현대인은 ‘상징’보다는 ‘교환’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자신마저 사용가치화해야 하는 우리 모두는 사용·교환·기호, 그리고 상징의 경계선에서 서성거린다.



사용·교환·기호, 그리고 상징

      현대철학자 보드리야르2)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사용가치(use value)’, ‘교환가치(exchange value)’, ‘기호가치(sign value)’, ‘상징가치(symbol value)’를 가지며,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상품’, ‘기호’, ‘상징’의 지위를 취하게 된다3)고 말했다. 다이아몬드를 예로 보자. ‘도구’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다이아몬드는 가장 견고한 광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할 수 있고 이때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를 가진다. ‘상품’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교환가치’를 가지고, 기호의 가치로 바라보면 다이몬드는 가난한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부자들의 신분 표시로 사용될 수 있다. 즉 ‘나’는 상류계층에 속하고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결혼 예물로 주어질 때는 ‘사랑’을 의미하는 ‘상징가치'를 가진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사물의 가치 중에서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다. 어떤 사물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질 때, 조금 더 양보해서 기호 가치를 가질 때 그 사물은 현대사회에서 유용성을 획득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능장이 만들어내는 전통공예품은 어떨까. 오래전 분명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유용성이 사라졌다. 만약 전통공예품이 과거처럼 실생활 속에 쓰이고(사용가치), 다이아몬드처럼 다른 사물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사용이나 교환이라는 유용성을 잃어버린 전통공예품의 가치는 최종호 교수의 브리핑처럼 역사·학술·예술·경관적 가치이며,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전통미와 생활 문화를 함축하는 상징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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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②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6호 장송모 자기장. 이제 그의 나이는 여든 둘이다.
    ③, ④ 손때 묻은 장송모 자기장의 책상
    ⑤  문 틈으로 보이는 빙렬자기
    ⑥ 일행이 장승모 자기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자기장4) 장승모(강원도 무형문화재 제6호 기능보유자)


   강원도 횡성에서 도자전수교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장승모 자기장(강원도 무형문화재 제6호 기능보유자)은 우리나라 전통공예의 상징가치를 획득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가 만든 자기는 여러 차례 국빈(國賓) 선물용으로 사용되었고, 중국 북경의 청화대학 박물관, 미국 스미소니언(smithonian) 자연사 박물관, 일본 북해도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니 이때 그의 공예품은 사용·교환·기호의 가치가 아니라 상징의 가치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가치의 중심에는 장승모 자기장이 평생을 걸쳐 재현해낸 전통 균열자기(均裂瓷器)가 있다. 표면에 잔잔하게 금이 간 ‘균열자기’는 과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존재했지만 현대에 와서 사라져버린 우리의 전통자기 중의 하나다. 도자를 만드는 태토(도자를 만드는 재료인 흙)는 네 가지의 흙이 사용되고 유약은 10여 가지의 돌가루가 사용된다. 이를 비율에 맞게 잘 섞어야 균열자기를 얻을 수 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기술이 바로 도자공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이 균열을 재현하기 위하여 도자공 장송모는 강진과 양구 등 방방곡곡 흙을 찾아 다녔고 옛 가마터를 다니며 사금파리들을 뒤졌다. 그 덕분에 전통 자기를 만드는 전통기법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의 도자 역사 등 관련 지식을 섭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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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장송모 자기장과 그의 빙렬백자. 조선시대 사금파리에 그려졌던 초충도가 그려져 있다.
    ②~⑤ 전수교육관 내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장송모 자기장의 작품.


     그는 전수교육관을 찾는 방문객에게 우리나라 도자의 역사는 물론 일본의 도자 역사와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하며 ‘일본이 현대 도자의 메카로 알려졌지만 전통 도자는 우리나라가 최고’며 ‘일본 전역을 다 돌아보아도 청자처럼 깨끗하고 백자처럼 소박한 자기를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또, ‘여주·이천이 중심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강원도가 원류라는 사실도 잊지 말라’며 지역 사랑을 드러내기도 한다. 약 48년 전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우연하게 물레질을 시작했다는 장송모 자기장은 82세. 일제강압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모진 역사를 겪은 그가 그 긴 세월동안 부등켜 안은 것이 자기였다.

     그는 자신이 재현한 균열자기에 ‘빙렬백자(氷裂白磁)’라 이름 붙였다. 이 빙렬백자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도자를 만들던 것처럼 강원도의 백토(白土)와 자목(柴木)을 사용해 무광택에 비취색과 회색, 그리고 흰색의 중간색을 띠고 있다. 도자공 장송모는 백토를 찾다가 발견한 조선시대의 사금파리에서 발견했던 초충도(草蟲圖) 문양을 그려 넣었다. 은은하고 청아(淸雅)한 분위기의 백자와 단아한 그의 초충도는 궁합이 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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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 자기의 재현을 위하여 도자공 장송모는 강진과 양구 등 방방곡곡 흙을 찾아 다녔고 옛 가마터를 다니며 사금파리들을 모았다.


     그의 도자를 놓고 그저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가치나 사용가치, 그리고 고상한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기호 가치’로만 인식한다면, 우리의 문화정체성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공예품이 ‘도구’, ‘상품’, ‘기호’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 이른바 ‘돈’이 되면 좋겠다는 시선도 있겠지만 상징가치가 없는 상품화는 위험하다. 전통공예품이 ‘도구’, ‘상품’, ‘기호’라는 상품으로서 가치가 강조되다 보면 그 동안 지켜온 전통성과 작품성, 그리고 예술성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사용·교환·기호, 그리고 상징의 경계에서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용’과 ‘교환’, ‘기호’이라는 경제적 가치만을 갖는 것일까? 이것은 보드리야르, 피에르 부르디외 등 현대 프랑스 철학가와 사회학자들이 관심 있게 다루어온 화두(話頭)였다. 사실 ‘나’를 비롯한 우리,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은 ‘사용’과 ‘교환’, ‘기호’라는 ‘상품’ 가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돈’에 울고 웃는 현대인이 ‘상징’보다는 ‘교환’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의 고유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고유성은 서로 교환될 수 없는 것이다. 교환가치로 인식하는 차와 집은 교환할 수 있지만, 이동수단이라는 차의 고유성과 거주지라는 집의 고유성만을 놓고 보면 교환할 수 없는 것이다.

    고유성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세계는 교환할 수 없는 것’,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5) 소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공예품 또한 ‘교환할 수 없는 것’,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생활 문화의 미적인 함축이라는 그 고유성 위에 ‘사용’과 ‘교환’, ‘기호’라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더하는 것이지, 상품 가치를 위해 고유성을 훼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용’과 ‘교환’ 가치가 지배적인 현대사회에서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가치를 높이는 방법, 나아가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의 재정자립도를 높일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좋은 대표적인 방법이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도구’, ‘상품’, ‘기호’라는 상품가치로 유형의 공예품에 전착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라는 무형의 가치에 시선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아무리 많이 유통된다고 하더라도 전통공예품의 전통성?예술성?작품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장송모 도자공이 운영하고 있는 횡성전통도자 전수교육관은 체험 프로그램의 활성화와 투어(tour) 등의 프로그램이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실습실, 강의장이 갖추어져 있고 숙식이 가능한 생활관까지 마련되어 있어 여건이 좋은 편이다. 여기에 장송모 자기장의 노력이 뒷받침되어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약 12,800명(약 320회)이 다녀갔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얻어내는 이익이 전체 운영 경비의 약 1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정비하고 수익을 높여 전수교육관 운영경비로 사용한다면 전통공예품을 시장에 내놓지 않더라도 자립적인 전수관 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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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④ 건조실. 물레질을 마친 자기들이 잘 말라가고 있다.
    ⑤~⑥ 전통가마. 그 옆에 땔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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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② 전수관내 실습실. 전수관을 방문하는 체험 프로그램 잠가자들이 물레를 돌라며 자기를 만들 수 있다.
    ③~⑥ 체험 프로그램들이 만든 작품. 마르고 나면 가마에 넣어 자기를 완성하고 잘 포장하여 체험자들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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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문화재청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진행하고 있는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활성화 컨설팅> 일환으로 무형문화제 전수교육관을 둘러보고 쓴 탐방기입니다.





미주 -----------------

1) 나전장(螺鈿匠) : 옻칠한 기물의 바탕에 자개를 박아 붙여 장식하는 기능인을 말한다. 원래 자개를 박는 나전장과 옻칠을 맡은 칠장이 각기 분업화되어 있었지만 옻칠의 사용이 점차 적어지자 칠장의 존재는 나전장 기능 속에 흡수되었다.

2)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 7. 27일~2007. 3. 6)는 대중과 대중문화 그리고 미디어와 소비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그의 이론은 특히 미국의 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30년 프랑스 남부 딩겐에서 태어났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철학교수 자격을 취득하여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958년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었으며, 전후에는 알지에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였다. 그 후 파리 대학에서 레이몽 아롱의 조교 생활, 릴 대학에서의 강사를 거쳐, 1964년 30대 전반에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교수이자 연구주임으로 취임했으며, 교육문화사회센터(1969년에 유럽사회학센터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름)를 창설하여 소장 연구자들과의 공동 연구를 추진했다. 1975년 학술 연구 잡지인 <사회과학연구학보>를 창간, 편집장으로 재직하면서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예술, 문학, 민족, 언어, 취향, 스포츠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1981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강좌교수에 임명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알제리의 사회학(Sociologie de Algjerie)>(1961), <상속자들(Les Heritiers)>(1964), <중간예술(Un art moyen)>(1965), <예술 애호(L'amour de l'art)>(1966), <재생산(La Reproduction)>(1970), <자본주의의 아비투스(Alg?rie 60)>, <구별 짓기(La Distinction)>(1979), <실천 감각(Le sens pratique)>(1980),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Questions de sociologie)>, <말하기의 의미(Ce que parler veut dire)>(1982), <국가 귀족(La Noblesse d'Etat)>(1989), <자유교환(Libre-Echange)> (1994), <실천이성(Raisons pratiques)>(1994) 등이 있으며, 이 외에 수많은 논문들이 있다.

 3) 장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1973)

 4) 자기장(瓷器匠) : 자기를 만드는 기능인을 말한다. 자기는 흙을 빚어 높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낸 그릇이나 장식물인 도자기(陶瓷器, Porcelain)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1,300℃ 이하의 온도에서 구운 것을 도기(陶器 earthernware/pottery)라고 하며 1,300∼1,500℃에서 구운 것을 자기(磁器, porcelain)라고 한다.

 5) 장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1973)





2010/07/21 18:00 2010/07/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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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지배 중심 문화에서 다양성으로
- 신명호의 <<조선왕비실록>>(역사의 아침, 2009) -

 

이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명호의 <<조선왕비실록>>(역사의 아침, 2009)을 읽었다. <<왕을 위한 변명>>, <<조선의 왕>>,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 문화>> 등의 책을 펴낸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사실’에 충실해 원경황후, 정희왕후, 인수대비, 인목황후,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 등 일곱 왕비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냈다. 왕비가 되기 전의 어린 시절, 성장 환경, 친정의 가문 배경까지 다뤄 왕비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의 일생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7년 5월 초판을 발행하고 채 2년이 되지 않아 13쇄를 찍었다.

      사실, 실록(實錄)이란 한 임금의 재위 기간 동안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라 왕비의 삶이 자세하게 담길 수 없다. 실록은 국가 통치자의 사적을 기록하는 것이다 보니 이권이 개입될 수 있으며 자칫하면 사화(士禍)를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민감해 철저하게 사실만을 기록한다는 원칙에 의해 편찬되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하여 국가의 각종 회의나 모임에 참석한 사관들이 사초를 기록하고, 이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실록을 편찬한 뒤에는 사관들이 썼던 사초는 세초(洗草)라고 하여 모두 물로 씻어 없애 분쟁의 소지를 없앴다. 이렇게 철저한 보안 속에 조선시대 임금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처럼 자신의 의견을 더하지 않고 일곱 왕비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써내려 갔다. 조선 왕비들이 주인공이니 ‘조선왕비’, 사관처럼 사실만을 기록했으니 ‘실록’이라 이름 붙여 ‘조선왕비실록’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조선왕비실록>>은 역사 속에 잘 드러나지 않는 원경황후, 정희왕후, 인수대비, 인목황후,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 등의 어린 시절과 그녀들을 둘러 싼 사람들의 관계 등을 행록과 행장, 묘지명 등 여러 사료를 고증해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그려내고 있다. ‘조선시대 왕비들의 삶과 당시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진실되고 깊이 있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머리글은 의도를 배제하고 사실만을 말하겠다는 역사학자로서의 신념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역사서의 기록이 반드시 그 사실만을 기록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조차 사실을 기록한 사초를 바탕 삼지만 왕이 죽은 다음해 춘추관(春秋館)에서 좌/우의정을 총재관으로 하여 편찬되기 때문에 그 편찬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고 비틀려질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다. 갈릴레오나 코페르니쿠스의 일화에서처럼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자연과학도 비틀려지는데, 인문학에 속하는 사학(史學)이 온전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서라고 해서 과거 일어났던 수많은 모든 사건들, 존재했던 유?무명의 모든 사람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다. 어떤 사실은 버려지고 어떤 사실은 선택되어 기록된다. 이 과정에서 특정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의도적으로 특정 사실만을 나열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계열화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 1892-1982)는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라고 말하고, 심지어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 자체가 불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역사는 가치를 가진다. 한 번 정리되고 기록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다시 재구성되면서 역사는 ‘현재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신명호가 조선시대 왕비의 삶을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을 뿐인 이 책 또한 의도하지 않더라도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을 수 있다. 저자의 다른 책 <<조선공주실록>>(역사의 아침, 2009), <<궁궐의 꽃, 궁녀>>(시공사, 2004), <<조선의 궁궐에서 일했던 사람들, 궁>>(고래실, 2006)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명호가 그 동안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master)이었던 임금이나 중요 관료들이 아니라 조연(supporter)에 속에는 공주, 궁녀, 일하던 사람들에 주목한다는 것은 지배 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메이어(major)에서 마이너러티(minority)로, 단일화에서 다양성의 시대로 나가는 우리 시대의 방향을 짐작케 한다.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저자의 역사서에서 그 대상이 왕에서 왕비로, 궁녀로 바뀌고 그 책이 대중들로부터 관심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시대정신이 단일화된 지배중심 문화가 아니라 다양성을 가진 문화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며, 이 시대정신이 저자에게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정의 사실이 집중적으로 나열되고 계열화되면 동시대인에게 봉상스(bon sens, 양식)를 형성하고, 이 약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다시 계열화하며 한 시대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 좋은 예가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혹자는 이 책을 두고 남성 중심의 역사와 여성 중심의 역사라는 시각으로 리뷰를 쓰고, 심지어 출판사 서평초차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거의 모든 공은 남성에게 귀속되었고, 그것은 왕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역사에서 왕비는 분명 존재했음에도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라고 쓰며 과거 봉상스로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인의 역사 인식도 포함된다. 그 오해의 진원지는 대부분은 과거의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역사서에 의지해 단편적으로 바라보거나, 과거의 역사를 당시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으로 임의적으로 조립하고 양식화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과거 우리의 사회를 두고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였다고 양식화하는 것이다. 이 일반화는 남북분단 상황, 그리고 산업화를 앞세우던 6,70년대의 시대 상황에서 가부장적 지배논리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충효사상(忠孝思想)이 강조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 양식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주역은 지배층 중심의 역사 교육이었다.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였다고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에는 과거 조선시대 지배 논리로 이용되었던 유학(儒學)이 놓여 있다. 여성들의 재혼을 금지하고, 열녀비를 세우면서 불사이부(不事二夫)가 강조되었다는 등의 교육을 받고, 당시 사회는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였다고 양식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도리어 그 반대일 수가 많다. 합목적적 질서체계(合目的的 秩序體系, 법규나 규칙, 규정 등)는 어떤 성향들이 사회 질서를 해칠 정도로 많이 나타날 때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재혼을 금지하고 불사이부의 정신이 강조되었다는 것은 반대로 많은 여성들이 재혼을 하고 비정상적인 사랑이 성행해 사회 질서를 해칠 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화가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신윤복의 그림 중 가장 빼어난 수작으로 꼽히는 ‘단오풍정(端午風情)’에는 가슴을 드러내 놓고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여인들 너머 이를 바라보는 남정네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기다림>이라는 그림에는 뒤뜰에서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사대부집 여인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그림뿐만 아니라 이런 사실은 현재 남아 전하는 대부분의 고대가요, 향가, 속요, 별곡에 나타나고 심지어  주류 정통 역사서에도 많이 보인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고려사에는 재상인 조석견을 방문한 강윤충을 유혹하는 조석정의 처 장씨 이야기가 나오고 주로 여성들이 먼저 강윤충을 유혹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정한 기준(제사)에 따라 아들이나 딸에게 모두 공평하게 재산을 상속하고, 거의 태반의 남성들이 ‘장가 가서’ 아예 처가에서 생활하던 역사적 사실을 버려두고 당시 지배논리에 맞는 사실만이 나열되면서 과거 우리의 사회가 가부장제 사회, 혹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라고 계열화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 철학자 슬로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그’이며 또한 ‘이데올로그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명호의 <<조선왕비실록>>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일곱 왕비의 삶을 있는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스스로 사초를 기록하던 사관처럼 철저한 고증에 의해 객관적인 사실만을 써내려 갔다. 그러나 잘 반추해 본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이 역사서를 읽는 재미다. 아 참, 잠깐. ‘모든 사람이 부와 명예를 추구한다’는 저자의 첫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2010/07/09 01:58 2010/07/09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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