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피에’와 ‘시니피앙’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글쓰기에 ‘논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심지어 최근에는 ‘창의’라는 말을 붙여 ‘창의적 논술’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본질을 놓고 본다면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글쓰기는 모두 ‘논리적’이다. 언어(言語)라는 것이 원래 논리적으로 결합된 기호 체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어라는 약속된 기호 체계로 세상을 이해한다. 네모나고 다리가 네 개인 물체를 보면 우리의 뇌는 그 사물(시니피에, Signifie, 표의)을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학습되어온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을 ‘책상’(시니피앙, Signifiant, 표기)이라고 기억하고 전달한다. 그래서 사람은 학습된 언어 체계로 같은 세상을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인체는 구조학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닭 우는 소리를 ‘꼬끼오’라고 인식할 때 미국 사람들은 ‘커커두들두’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본다면 언어라는 기호가 뜻하는 원래 세상 속의 사물을 ‘시니피에(Signifie, 표의)’라 하고, ‘책상’이나 ‘꼬끼오’라고 표기되는 것을 ‘시니피앙(Signifiant, 표기)’이라고 이야기한다. 글쓰기라는 것은, 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모두 ‘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언어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지성(知性)에 의지하지 않고 감정(感情)에 의지한다. 감정적인 말로 꼬투리를 잡거나 화를 돋우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이 감정해 의지해 욕설이나 실언을 해도 문제가 법인데 사회가 감정에 의지하게 되면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감정에 휩싸여 쓰는 인터넷 댓글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일이다. 바르게 글을 읽고 바르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될 때 혼란을 부추기는 사회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안정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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