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의 사물이 이웃항과 접속하면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때, 그것을 ‘사건화’된다고 하고, 이렇게 복수의 사물을 하나의 계열(series)로 연결하는 것을 ‘계열화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사물은 계열화되는 선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중략)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몬(羅生門)>은 사실과 다른 사건의 개념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나무꾼이 사람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그저 죽은 사람의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몸의 주변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가슴에 꽂힌 칼, 남자의 망건, 끊어진 포승줄, 망사천을 둘러친 여자의 큰 모자 등등. 여기는 우리는 나무꾼처럼 질문하게 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사물을 사건화하는 질문입니다.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살인 사건 현장에서 경찰이 던지는 질문이고 또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이지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건화하는 사물들의 계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즉 추가적으로 계열화되어야 할 항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모자의 주인인 여자, 칼을 꽂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선 그 사람들을 잡아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먼저, 칼을 꽂은 장본인임을 자처하는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남자를 속이곤 여자를 겁탈하고 그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결투를 벌이다 그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항들을 계열화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이 경우 사건의 의미는 여자를 두고 벌이는 남자들의 결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려온 여자의 말은 다릅니다. 타조마루가 겁탈하고 가버린 뒤, 자신이 남편의 포승을 끊었는데,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남편의 싸늘한 시선, 경멸과 욕설을 담은 듯한 그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찔러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건 또 완전히 다른 계열화의 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선 칼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습니다. 대신 싸늘한 시선이 여자의 몸을 찌르고, 그로 인해 여자의 손에 든 칼이 남자의 몸을 찌릅니다. 당연히 죽음의 의미도 달라지지요.
영매(靈媒)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죽은 남자의 말은 그 둘과 또 다릅니다. 여자를 겁탈한 후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꼬드기든 산적 앞에서, 울던 여자가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을 겨누었다고. 남편을 두고 당신을 따라갈 순 없으니 남편을 죽이고 가자고 하는 그 극적인 배신 앞에서 나는 절망했노라고. 놀란 타조마루마저 이 여자를 밟고선 “이 여자 어덯게 할까? 죽일까? 네 뜻대로 하지”라고 물었고, 그 순간 자신은 이미 그 도둑을 용서했노라고. 도둑이 포승을 풀러온 사이 여자는 도망치고, 자신은 배신의 설움에 비통해 하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칼을 가슴에 꽂았노라고.
일단 이것만으로 우리는 하나의 시신을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상이한 계열화의 선을 보게 됩니다. 그 계열화의 선이 달라짐에 따라 사실들은 전혀 다른 사건이 되고, 시신의 의미, 그 죽음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시신들의 이웃항들, 그 이웃관계에 따라 그것의 의미가 달라지는 거지요. (중략)
여기서 사물의 접속, 혹은 계열화를 통해 정의되는 사건의 개념이 접속을 통해 만들어지는 차이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즉 물질성을 갖는 구조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런 저런 변형을 가해도 변하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웃하는 항 하나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렇다고 그것을 주체가 대상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어떻게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하는 것이기에 결코 주관적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얼마든지 반복됩니다. 여자를 둘러싼 결투도, 모욕적인 시선에 대한 분노도, 배신에 대한 절망도 얼마든지 반복되는 사건이란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어디 이것뿐인가요? 원한에 의한 살인, 유산을 노리는 존속살인, 강도들의 뜻하지 않은 살인 등등. 여기서 어떤 살인이 가령 유산을 노린 살인이라고 하려면, 그에 대한 고유한 사물들의 최소한의 계열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시신은 가족이나 배우자, 혹은 친족과 계열화되어야 하고, 거기에 유산이라는 재물이 계열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계열이 발견된다면, 그게 미국에서 일어나든 일본에서 일어나든, 과거에 일어난 일이든 미래에 일어날 일이든 모두 ‘유산을 노린 존속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건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런 사건의 집합을 ‘이념적 사건(Ideal event)’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복되는 사건은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다른 요소들을 수반하여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독약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직접 칼을 쓰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청부살인을 하기도 하고 등등. 그래서 ‘이념적 사건’에 포함되는 모든 사건은 항상 어떤 ‘차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략)
가령 사진 한 장을 본다고 합니다. 거기에 죽은 시신 옆에 피묻은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우리는 그를 ‘살인자’로 간주합니다. 시신-칼-피-사람이라는 계열화가 ‘살인’이라는 사건으로 계열화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 사건을 조사하러 온 형사가 범행에 사용된 칼을 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육점 주인이 죽은 시신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경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식(良識)에 따라 살인자로 즉시 계열화하여 포착합니다. 그게 ‘양식’이고 흔히 말하는 ‘상식’이지요.
이런 점에서 ‘양식’이나 ‘상식’이란 다양한 계열화의 가능성을 제한하여 어느 하나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양식을 불어로는 봉상스(bon sens)라고 하는데, 상스(sens)라는 말에는 ‘의미’와 더불어 ‘방향’이란 뜻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계열화의 ‘좋은 방향’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계열화하게 만드는 힘이 작동하고 있는 거지요. 그것은 통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통상적으로 오해하게 하는 힘이며, 다른 종류의 계열화를 가로막는 힘이지요. (중략)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양식에 따른 계열화를 끊임없이 풍자하고 비판합니다. 가령 소녀와 빵과 뜀박질을 양식에 따라 계열화하는 사람은 그것을 ‘도둑질’로 사건화하지만, 그것이 트럭에서 떨어진 깃발을 들고 가는 찰리와 그 뒤에 골목길에서 나와 전진하는 시위대가 그저 우연히 접속한 것임을 아는 우리는 그를 체포하러 달려드는 경찰들을 보고 웃게 됩니다. 이처럼 양식에 반하는 계열화를 통해서 양식의 힘과 대결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들뢰즈는 ‘역설(paradox)’이라고 정의합니다. 역설이란 통념을 통하여 그리스어 독사(doxa)에, ‘반하여(Against)’를 뜻하는 para를 넣어 만든 말이지요. 양식이란 통념(doxa)에 반하는(para) 계열화를 유발하여 새로운 사건으로,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장치라고 말하는 거지요. (중략)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양식과 통념에 반하여 이전과 다른 의미를 만드는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그리는 것, 새로운 의미, 새로운 사유 가능성의 지대를 여는 것, 이게 바로 양식과 역설이란 개념을 통해서 들뢰즈가 제안하는 또 다른 ‘의미의 논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존의 것을 변이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건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사건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즉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논리나 사건화의 방법을 해명하면서,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와 다른 변이와 생성의 선을 그리는 새로운 의미의 논리, 사건화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의미를 재생산하는 것이 ‘정착적인 것’이라면, 이처럼 새로운 사건화의 선을 통해서 주어진 의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창안하는 것을 ‘유목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노마디즘(nomadism)'이라고 부르는 철학 내지 정치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













96933
54
8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