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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Canon EF 50mm / 경북 상주





   ...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고산지대에 사는 인간, 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에 사는 인간, 사막의 오아시스 근처에 사는 인간, 대도시에 사는 인간, 오지에 사는 인간. 분명히 인종은 동일한 인간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이 사는 공간의 흔적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거대한 자연적 공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공간을 분할하여 만든 건축물과 같은 인위적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에를 들어 천주교 성당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부를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중세풍의 인테리어 장식, 적절한 공간에 배치된 성스러운 촛불들.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누구나 성당이란 공간이 내뿜는 강렬한 힘을 느낍니다. 이런 공간에 적응해가며 천주교적 인간, 일종의 종교적 인간이 탄생하게 됩니다.

     공간이 지닌 지배력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상의 ‘권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던보이 이상은 소비문화가 작동하는 경성이란 도시가 키워낸 인물입니다. 때문에 시골에서 느꼈던 감정의 바탕에는 그에게 친숙한 도시에서의 삶과 정서가 놓여 있습니다. 즉 이상이 시골에서 권태라는 감정은 도시라는 공간과 시골이라는 공간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도시는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길들여 자기에게 맞는 인간 유형을 만들어낼까요? (중략)

     흔히 우리는 인간을 감정적이고 수동적이기보다 지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짐멜은 이런 통념을 비판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이란 대도시처럼 수많은 자극이 넘쳐나는 공간에 살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산물에 불과합니다.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짐멜의 논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세계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따라 구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략)

    분주한 삶을 영위하던 한 도시인이 어느 깊은 산골에 내려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도시인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그리고 비인격적인 인간관계에 신물이 나서 잠시 도시를 떠났습니다. 우리 주인공에게 시골의 첫인상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녹음으로 우겨진 깊은 산골, 그 사이로 조용히 흐르는 개울물, 친절하고 정 많은 시골사람들, 기름기 없고 소박한 시골의 정겨운 음식들. 아마 도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조릴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지금까지 매연과 경쟁에 찌든 도시에 살았던 말인가? 한적하고 여유로운 시골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갈 만한 진정한 터전이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시골사람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인은 짐멜이 이야기한 것처럼 ‘답답함’을 느낍니다. 물론 이런 감정은 모던보이 이상이 시골에서 느꼈던 ‘권태’와도 유사합니다. 푸르른 자연 풍광은 이제 지루하기만 하고, 몇 명되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지나친 친절함은 간섭처럼 귀찮게 느껴지고, 자연에서 직접 채취해 요리한 야채 음식들은 어느 순간 입에 물립니다. 이제 우리 주인공은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떠나온 대도시를 그리워합니다. (중략)

     그런데 도시인은 시골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감정 이면에는 도시라는 공간이 만들어준 ‘자유’의 감정이 전제되어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시골보다 도시에서 더 자유롭다고 느낄까요? 이제 자유에 대한 짐멜 논문의 후반부 이야기를 경청해 봅시다.

     좀 더 정신적이고 세련된 의미에서 대도시인은 사소한 일들과 편견들에 얽매이는 소도시인들에 대해 ‘자유롭다’. 대도시와 같이 큰 집단이 가진 지적인 삶의 조건들이나 상호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라는 태도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개인의 자립성이 훼손되곤 하는 작은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라기보다는 대도시처럼 인구가 극도로 밀집한 곳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일 것이다. 이는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 공간의 협소성이야말로 정신적 거리를 가장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대도시만큼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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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i life)>, 1903

* 게오르그 짐멜 :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학, 민족심리학, 철학 및 예술사를 공부했으며, 칸트 철학에 관한 연구로 1881년 박사학위를, 그리고 1884년에 '하빌리타치온(대학교수자격)'을 취득했다. 1885년부터 베를린 대학 철학과에서 사강사로 일하기 시작해 1901년에 부교수가 되었으나, 1914년이 되어서야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짐멜은 <사회분화론>, <도덕과학서설>, <역사철학의 문제들>, <돈의 철학>, <칸트>, <철학의 주요 문제들>, <괴테>, <칸트와 괴테>, <쇼펜하우어와 니체>, <사회학>, <사회학의 근본문제>, <렘브란트>를 비롯해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며,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사회학이나 (사회)심리학, 문학과 같은 경험과학, 철학, 인식론, 윤리학, 형이상학, 미학 등 실로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인간, 사회, 역사, 문화, 예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짐멜은 막스 베버나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거장에 견줄 만하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현상들에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사회의 심층적 구조와 본질을 읽어내는 짐멜의 지적 세계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아니, 단순한 매력 그 이상이다. 모더니티 담론과 포스트모더니티 담론은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거대한 정신세계에 회귀하면서 더욱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2010/06/15 15:29 2010/06/1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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