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opyright by Mudbull

▲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안양예술공원






    ...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다른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를 표시하는 요소(signifying elements)’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symbol)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요구와 더 이상 관련되어 있지 않다. 바로 그 이유는 사물이 전혀 다른 것(그것은 사회적 논리일 수도 있고 욕망(desire)의 논리일 수도 있는데)에 대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무의식적이고 유동적인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와 사회>>. 1970 )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절대왕조와 함께 발전했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지요. 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 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힘이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막을 고하게 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합니다. 가령 동해에 위치한 강릉에서는 오징어 가격이 서울보다 쌉니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 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오징어가 가격 2000원에 팔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오징어를 1000원에 사서,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팝니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의 이윤이 남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 곳,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 떠나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략)

     반면 상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공간의 차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유행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유행이란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것이지요.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산업자본은 대중매체를 이용해 텔레비전 광고와 같은 직접 광고나 드라마 및 영화와 같은 간접광고를 통해 자신이 만든 상품을 하나의 유행으로, 다시 말해 가장 모던한 제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대중매체는 대가로 제공되는 산업자본의 광고료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결국 산업자본과 대중매체는 완전한 공생관계를 형성한 셈입니다. (중략)

     왜 신문사나 잡지사는 구독률에 목을 맬까요? 왜 공중파 방송사나 유선 방송사는 시청률에 관심을 집중할까요? 왜 인터넷 사이트는 조회 수에 신경을 쓸까요? 구독률, 시청률, 그리고 조회가 높을수록 대중매체는 산업자본으로부터 광고비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신문사의 고상한 기사들, 방송사의 매혹적인 드라마들, 인터넷 사이트의 유익한 정보들은 모두 소비자를 유혹하는 일종의 미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인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안하게 해주는 객관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객관적 기능 안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겠지요. (중략) 반면 자신의 신분이나 부유함을 나타내는 차원이라면, 고급 자동차나 고급 아파트는 대체 가능하겠지요. (중략)

     보드라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너머서는 차원, 즉 “암시적 의미와 영역”에서 사물은 ‘기호(sign)’의 가치를 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호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증거로서, 보드리야르는 그 사례의 하나로 세탁기를 언급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합니다.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그것은 세탁기라는 어떤 사물의 사용가치를 의미합니다. (중략) 하지만 보드라야르가 주목했던 것은 세탁기가 상징하는 ’행복, 위세 등의 요소‘라는 다른 가치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의 사용가치와 무관한 이런 가치를 ’기호‘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 집 안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열어 놓은 소비사회의 유혹에 포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산업 자본은 계속해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만약 소비자가 사용가치의 세계에 매몰됐다면 산업자본은 상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공장 가동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달성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상품에 기호를 기호가치를 새롭게 불어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산업자본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대중매체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소비자들이 기호가치가 옮아간 새로운 상품을 계속 사들이니까요. 산업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이 아직 사용가치가 채 소멸되지 않은 수많은 상품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게 만드는 체계입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3 00:02 2010/06/23 00:02

트랙백 주소 :: http://kwak.hosting.paran.com/tc/trackback/59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