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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광덕산





    ... 나 자신 혹은 나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이나 원인을 위해서 희생되어도 좋은 상품, 도구 , 혹은 기호로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스스로를 더 고상하고 훌륭한 다른 목적들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할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 놓은 집어등에 사로 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마치 선사(禪師)가 사자후를 토하듯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세계는 교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은 ‘아무 데서도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중략)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을 위해 이유, 원인, 목적성을 발견하는 것은 교환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장미 한 다발을 와인 한 병과 바꾸는 것이 바로 교환이지요. 그런데 교환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장미와 와인에 교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환을 하면, 장미가 가진 고유성과 와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무엇이든 서로 교환되려면 그것이 가진 생생한 질들을 모두 추상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돈’입니다. 장미는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고, 와인도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서로 바꿔도 된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환만을 염두해 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교환 가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눈앞에 아름다운 진달래가 피었다고 했을 때 지금 보는 진달래는 사실 교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작년에 피었던 진달래가 아니고, 혹은 내년에 피어날 진달래도 아닙니다. 더구나 진달래를 꺾어다가 다른 종류의 책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진달래의 고유성과 책의 고유성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진달래 역시 교환 가능한 사물의 일종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진달래가 피어난 이유, 원인, 혹은 목적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진달래는 계절의 변화와 씨앗이라는 조건 때문에 피었을 것이고, 이 꽃이 핀 목적은 자신의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생물학적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진달래는 존재를 몇 가지 환경 조건과 생물학적 이유들로 환원해버리면, 눈앞에는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어떤 분석의 대상 하나가 놓입니다. 이 상황에서 진달래의 아름다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꽆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겠지요.

    교환의 논리가 작동하려면 우선 인간의 추상적 사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추상적 사유는 결국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의교환 논리에 대한 비판은 아도르노가 수행했던 이성 비판의 전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위치에 비추어 보면 철학은 전통에 따라서 무관심을 표명한 것에, 즉 비개년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둔다. 말하자면 플라톤 이래 덧없고 사소한 것이라고 배척당하고 헤겔이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꼬리표 붙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우발적인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양으로 격하된 질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으로 된다.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1966)


    아도르노는 미래의 철학이 맡아야 할 임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앞으로 도래한 철학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 그리고 ‘비개념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철학이, 이성이나 개념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해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프랑스의 해체론적 경향의 흐름을 선취한 인물이었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ida, 1930~2004)나 들뢰즈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도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 사유를 철저히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도르노가 꿈꾼 철학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철학을 앞으로 세대가 공유한다면, 모든 것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유해온 자본주의 논리도 어느 정도 해소될 지 모릅니다. ‘말할 수 없는 것’,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이 배제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추상적 교환 논리는 사유나 이성을 통해서 고유성을 가진 사물들을 추상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감성의 구체성을 부정하고 이성의 추상성을 긍정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성의 추상성이 구체적 감성으로 포착되는 사물과 사건들의 생생함과 다양함을 부정한다면, 결국 추상적 교환 논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미적 감수성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7 22:53 2010/06/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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