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남한산성
... 아마데우가 막 잠이 들었을 때, 아드리나아의 귀에 한낮의 고요함을 찢는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옆집 대문 앞의 계단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를 에워싸고 서서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요란하게 손짓을 했다.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 신발 끝으로 쓰려져 있는 남자를 걷어차는 것 같았다. 키가 큰 남자 둘이 사람들을 밀치고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병원 입구까지 들고 왔다. 그제야 남자를 알아본 아드리아나는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전단에서 본 멩지스였다. 사진 아래 ‘리스본의 인간 백정’이라고 적혀 있던 사람. (중략)
오빠는 돌처럼 굳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멩지스를 내려다봤어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창백했던 그의 얼굴을요. (중략) 털이 난 가슴에 먼저 귀를 대고 들은 다음, 내가 건네준 청진기를 가져다 댔어요. ‘강심제!’ 오빠는 이 한 마디만 했어요. 꽉 눌린 그 목소리에는 억누르는 증오가 번쩍이는 칼날처럼 묻어났어요. 내가 주사기에 약을 넣을 동안 오빠가 심장마사지를 했는데,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주사기를 건네줄 때 우리 시선이 아주 잠깐 마주쳤어요. 그 순간 오빠가 얼마나 안터까웠던지! 그때 오빠는 냉철하고도 완고한 의지로 진찰대에 누워 있는 이 살찐 땀투성이 남자, 사람들이 모두 고문과 살인과 국민에 대한 잔인한 억압의 책임자라고 짐작하는 그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욕망과 싸우고 있었어요. 그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죠.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운! 몇 초 동안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충분했으니까요! (중략)
갑자기 ‘배신자! 배신자!’라고 외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사람들은 들것에 실린 멩지스가 살아 있다는 걸 보고, 마땅히 죽었어야 할 그를 살린 사람을 정당한 심판을 져버린 배신자로 생각하고 분노를 이쪽으로 돌린 거예요. (중략) 오바가 문을 열자 고함 소리가 사라졌어요.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은 채 한참 동안 서 있었어요. 사람들은 오빠가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하길 기다렸지요. (중략)
‘난 의사요.’ 오빠는 이렇게 말하고, 맹세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말했어요. ‘난 의사라고요.’ 난 근처에 살면서 우리 병원에 다니는 환자 서너 명을 알아봤어요. 이 사람들은 당황하여 땅바닥을 내려다봤어요. ‘그자는 살인자요!’ 누군가 외쳤고, 다른 사람들도 ‘인간백정!’이라고 소리쳤어요. 오빠의 어깨가 힘겹게 숨을 쉬느라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인간이에요.’ 오빠는 크고 또렷하게 말했어요. (중략)
그러자 누군가 바로 토마토를 던졌어요. 그 토마토는 오빠의 흰 가운에서 터졌어요. 9중략) 어떤 여자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오빠 앞에 서더니 얼굴에 침을 뱉었어요. (중략) 그 여자는 마치 몸에서 영혼을 뱉어내듯이 여러 번 계속해서 침을 뱉었어요. 더러운 침은 오빠의 얼굴을 적시고 아래로 서서히 흘러내렸어요. (중략)
...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롱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나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문과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자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멩지스가 눈앞에 누웠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
Vs
... 김상헌은 혼자서 떠났다. 그의 행장은 가벼웠다. 책과 벼루를 버리고, 미숫가루 다섯 되와 말린 호박오가리 열 근을 챙겼다. 말을 배불리 먹이고, 두꺼운 솜옷에 털모자를 쓰고 환도를 허리에 찼다. 김상헌은 삼각산을 서쪽으로 돌아서 송파나루로 향했다. 송파에 이미 적이 들어와 있으면 더 상류로 올라가 와부에서 강을 건널 작심이었다.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 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프레 열렸다. 그 사이로 강물은 얼어붙어 있었다.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중략)
강이 얼어서 나룻배 두어 척은 강가에 묶여 있었다. 청병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청병이 다가온다는 소문에 나루터 마을은 흩어졌다. 남대문에서 방향을 돌린 어가행렬이 물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널 것이고, 청병은 임금의 뒤를 쫓아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주인 없는 개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김상헌을 향해 짖다가 달아났다. 빈 마을에 늙은 사공이 한 명 남아 있었다. 김상헌은 사공의 초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사공의 어린 딸이 끓는 물에 미숫가루를 풀어서 내왔다. (중략)
- 강을 건너시렵니까?
- 그렇다. 어젯밤에 어가행렬이 여기서 강을 건넜느냐?
-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람과 말이 모두 걸어서 건넜습니다. (중략)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에…….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중략)
- 내 말을 주마. 오늘 나를 건네다오. (중략)
- 말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 순한 말이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 가져라. (중략)
- 고마우신 말씀이나, 천한 사공이 배를 타지 어찌 말을 타리까. 더구나 눈이 쌓여 말먹이 풀을 구할 길이 없으니…….
사공이 김상헌의 발 아래 엎드려 가죽신에 새끼로 감발을 쳐주었다. 김상헌은 사공을 앞세우고 얼음 위로 나섰다. 겨울강은 물이 낮아서 물가 쪽으로 바위가 드러났다. 낮 동안 햇볕을 피해 구불구불 얼음 위를 건너갔다. 마주 보이던 나루터 마을도 비어 있었다. 돌무더기로 쌓은 선착장에서 부서진 배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김상헌은 선착장으로 올라섰다.
- 나는 남한산성으로 간다. 나를 따르겠느냐?
- 아니오. 빈집에 어린 딸이 있으니…….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이다.
- 그럼 가거라. 고맙다.
- 산성까지 여기서 한참이오. 서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길이 가팔라도 서문이 가깝소. (중략)
김상헌은 사공의 목덜미며 몸매를 찬찬이 살폈다. 야위고 가는 목에 힘줄과 핏줄들이 얼기설기 드러나 있었다. 힘줄은 힘들어 보였다. 밤새 강물이 굳게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이도 강을 건널 것이고,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다. 십만이라든가 십오만이라든가, 대병이 모두 강을 건너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것이고, 그 사나흘 동안 강물은 얼고 또 녹을 것이다.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에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 사공의 피가 김상헌의 얼굴에 튀었고, 눈물이 흘러내려 피에 섞였다. 김상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버려진 말이 길게 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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