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ritings/Prose'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0/10/09 이우 곽원효 문화이야기_ 속도
  2. 2010/04/09 이우 곽원효 인문학으로 길을 찾다
  3. 2010/01/06 이우 곽원효 BIZ글쓰기와 인문학 사이
  4. 2009/12/06 이우 곽원효 2009년의 화두(話頭) 소통, 그리고 포퓰리즘
  5. 2009/10/18 이우 곽원효 북 브리핑_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안인들>>
  6. 2009/09/09 이우 곽원효 ‘매끄러운’ 공간으로 길 떠나기
  7. 2009/08/21 이우 곽원효 소설 <남한산성>_ 김훈은 무엇을 말하는가
  8. 2009/08/07 이우 곽원효 글쓰기는 논리다
  9. 2009/07/29 이우 곽원효 어떤 동행(同行)
  10. 2009/02/07 이우 곽원효 빛과 그림자
  11. 2008/10/12 이우 곽원효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 문화이야기 ]


속도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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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 상주의 고찰, 남장사. 교통과 통신이 빨라지고, 정보도 빨라지고 있다, 속도는 경쟁력이다. 정말 그럴까. (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지구에서 안드로메다까지의 거리는 약 220만 광년. 빛의 속도로 달린다면 안드로메다까지 가는데 약 220만광년(1광년은 9조 5000억km)이 걸린다. 우리 기준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약 200억 시간이다. 밤 하늘을 쳐다보다가 안드로메다 은하에 속하는 별을 바볼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이미 200억년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밤 하늘에서 바라보는 별은 아무리 정밀하게 관측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의 모습. 현재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와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기 오토바이인 ‘킬라사이클’의 최고 속도는 시속 270km. 가속도는 더더욱 놀랍다. 시속 0마일에서 60마일(96km)에 도달하는 시간은 0.97초. 시동을 걸고 단지 1초 뒤면 시속 100km를 달린다. 이탈리아 스포츠카업체 페라리가 내놓은 5‘99 GTO’는 출력 670마력에 시속 335km를 달린다. '시속 100km 도달 속도'는 3.35초. 지금까지 출시한 도로주행용 차량 중 가장 빠르다. 미국의 제트엔진 비행기인 NASA의 ‘X-43A Scramjet’의 최고 속도는 마하 9.6. 소리의 속도( 초속 340m)보다 약 10배나 빠르다. 전차가 발사하는 포탄의 속도는 '마하4'라고 하니 그 빠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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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대문 시장. 패션이 유행하는 속도는 시속 36.5m.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중구 소공동까지 6개월, 부산까지는 1개월이 걸린다.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조선일보에 따르면, ‘명품 브랜드가 서울 강남에서 강북까지 유행하는 속도는 시속 약 1.57m’다. ‘다시 말해 명품의 본거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에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거리 6.5㎞)으로 진출하는 데 6개월이 걸린다. 그렇다면 강남에서 320㎞ 떨어져 있는 부산까지 명품 브랜드가 전파되는 속도는? 시속 36.5m다. 1년 걸린다.’ 길쌈을 하고 보부상이 어깨에 걸머지고 패션을 옮겼던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그래서일까. 2007년 제25회 대한민국패션대전’ 심사위원을 맡아 내한한 이탈리아 명품 니트 브랜드 미소니의 비토리오 미소니 회장은 ‘23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디자인은 유럽 디자인을 복제하는데 그쳤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다’며 한국 여성들의 패션 감각과 유행속도를 보고 놀라워했다. 올레!

   ‘나’는 지하철을 탄다. 출근하는 데 걸리는 1시간 20분, 퇴근 하는데 1시간 20분. 하루 중 약 세 시간을 시속 70~90km로 달린다. 역을 출발한 전철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뚜렷한 모습으로 서 있던 차창 밖 사물들이 뒤틀리기 시작하다가 흐르기 시작하고 마침내 형체를 잃는다. 물리학에서는 속도가 빨라지면 그 안에 있는 ‘나’에게 흐르는 시간은 느리게 간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속도가 빛의 속도(초속 299,792,458m, 시속 10억km)에 이르게 되면 ‘나’에게는 전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매일 시속 90Km로 세 시간을 달리는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늦게 늙는 셈이다. 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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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 전철. 속도는 경쟁력. 이 시대에서 속도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이렇게 우리 시대에서 속도는 경쟁력이 되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타고 다니는 지하철의 목적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것인 만큼 속도가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우리나라 지하철의 최고 속도는 사속 70~90km/h에 이르지만 실제 ‘표정 속도’는 시속 30km. 표정속도란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목적지까지 걸린 시간으로 나눈 것인데, 이때 소요시간에는 정류장에 정차한 시간도 포함된다. 표정속도가 빠를수록 승객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고 전철의 경쟁력은 높아진다. 빠르게, 더 빠르게. 문화의 속도도 경쟁력이다. 이미 말했지만 패션의 유행 속도는 시속 36.5m. 평균 3~4일이 걸리던 우편과 전신이 전화가 나오면서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웹 2.0’이 인터넷 서비스의 화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 이 웹의 시대도 가고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모바일 앱’의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잡고 ‘앱’ 공부를 하며 속도를 따라잡기 바쁘다. 게다가 컵 라면과 즉석 패스트푸드, 퀵 배달 서비스…. 후아, 정신없다.



    “… 디지털 문명의 요체는 기다림을 삭제했다는 데에 있다. 휴대전화를 보자. 유선 전화가 있던 시절, 전화를 받지 않으면 상대방은 없는 것이었다. 집이나 사무실에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상대방이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그 시간은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었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휴대전화가 일상화하면서 기다림은 사라졌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을 때,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중략) 이제는 전화를 하지 못하거나,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 자체가 실종이다. 기다림이 더는 용인되지 않는다. 기다림은 제거되었다. (중략) 사진을 찍는 순간도 그렇지만, 사진은 모든 과정이 기다림이었다. 필름을 현상할 때, 그리고 현상한 필름을 인화할 때, 나아가 슬라이드 필름으로 인쇄를 할 때,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그 시간을, 나는 ‘발효의 시간’이라고 명명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디카에는 기다림, 곧 과정이 없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액정화면에 사진이 뜬다. 촬영한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디카는 기록하면서 기록하지 않는다. (중략) 딸내미는 신용카드 크기 만한 디카를 들고 다닌다. 휴대전화에 이어 새로운 신체가 하나 더 장착된 것이다. 휴대 전화로 연락하고, 인터넷 채팅으로 대화하고, 디카로 보는 딸 앞에서 아날로그 세대의 아빠는 할 말이 없다. 딸애에게 얼마 전에 나온 강운구 선생의 <<시간의 빛>>을 한 번 읽어보라고 할 생각인데, 저 열 여섯 살 디카족이 강운구 선생의 리얼리즘과 인문학적 사유를 얼마나 소화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다. ‘땅의 마음’을 포착하기 위해 빛을 기다릴 줄 아는 강운구 선생의 앵글과 사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저 ‘발효의 시간’을 어떤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이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 (이문재의 <<이문재 산문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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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남대문로. 속도가 빨라지면 나는 여유로워질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속도는 공간과 관련된다. 시공간과 ‘나’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혼재한다.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교통과 통신이 빨라지면, 혹은 문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우리 생활이 여유로워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속도는 공간과 서로 관련된다.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빠르게 목적한 공간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물리학에서처럼 ‘나’에게 흐르는 시간 자체를 늦춰 여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과 ‘나’는 별개로 독립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 함께 혼재한다. 서울에서 시속 300Km 속도로 달려가 2시간 30분 만에 부산에 닿을 수 있지만 ‘나’의 생활은 전혀 여유로워지지 않는다. 도리어 바빠진다. 빠른 만큼 만나야 할 공간이 그 만큼 더 늘어나니까 더 많은 공간을 만나야 하고 또 그만큼 삶의 리듬을 빨리 바꿔야 한다는 것. 이것은 그만큼 더 바빠진다는 것을 뜻한다. 대중문화의 속도도 마찬가지다. 필름을 만들고 이동하고 상영기에 걸다가 디지털로 변하면서 동시 개봉이 대세다. 자칫하면 시대에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후우.


  사실 ‘빠르다’는 것은 ‘공간의 축약’이다.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시공간이 축약될 뿐 그 사이의 공간은 ‘스킵(Skip)’된다. 빨리 달릴수록 차창 밖의 풍경은 뒤틀리다가 마침내 바람처럼, 혹은 물처럼 흐르다가 마침내 형체가 사라지며 알아볼 수 없게 된다. 빠른 속도가 사이의 공간을 없애듯 빠른 문화는 기다림과 생각과 사고의 깊이를 없앤다. 얼마 전 한 자 한 자 손글씨로 적어나갔던 편지 속에는 전해야할 용건 외에도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 그 사람의 상황이 촘촘하게 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분위기 났다. 그러나 대체된 현대화된 메신저에는 용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 가끔  ‘^^’, ‘^~’, ‘@@’, ‘**’, ‘;;;’ 등 감정을 전하는 이모티콘이 따라오기는 한다. 그러나 이 이모티콘의 해석은 사실 너무 어렵다. 후아.


    “…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과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발바닥의 물집,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것이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중략)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의 빈터는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서)


  ‘깊이’가 아니라 ‘얕음’, ‘과정’이 아니라 ‘결과’, ‘너’ 아니면 ‘나’라는 단순한 이분법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가벼움은 ‘속도’에 집착하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지층들이다. 그래서인가. 빠른 것이 경쟁력인 시대에 지금 우리 문화의 코드는 ‘느리게’이다. 차로는 다니지 못하고 오로지 짐을 지고 두 발로 걸어야 하는 제주도 ‘올레길’이 열리더니 지리산 자락으로 ‘둘레길’이 열리고, 서울 교동의 ‘나들길’, 북한산 ‘둘레길’이 생기고 경기도 여주시는 강변을 따라 ‘여강길’을 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직 발로만 이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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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로 시티(Slow city) 전남 신안군 증도면. 느림도 경쟁력이 있다.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슬로 시티 운동이 대세다. 이 시대의 문화의 코드는 ‘느림’이다. 느리면 삶이 깊어진다.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또, ‘슬로 시티(Slow City)’가 여행지의 대세다. 말 그대로 ‘느린 도시’라는 ‘슬로 시티’의 공식 명칭은 ‘치타슬로(Cittaslow)’. 전통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등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커뮤니티다. 즉 공해 없는 자연에서 지역의 유기농 음식을 섭취하고 그 지역의 문화를 보존 및 공유하며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의 ‘느림의 철학’을 기본 이념으로 해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 그레베(Greve), 브라(Bra), 포지타노(Positano) 네 도시의 시장이 모여 산업화와 대도시화 등으로 인해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을 걱정하며 ‘인간답게 사는 마을’인 슬로우 시티 운동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20개국 132개 도시가 지정되어 있고(2010년 6월),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완도 청산도, 장흥 유치, 하동 악양, 신안 증도, 담양 창평 등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었고, 2010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국제슬로시티 시장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될 정도로 우리나라의 슬로시티 운동은 활발하다.

  ‘슬로 시티’의 심사 조건은 까다롭다. 모두 24개 항목을 심사하는데 특히 5개 핵심 항목이 집중적으로 검토된다. 인구가 5만 명 이하의 지역이어야 하고, 자연생태계가 철저히 보호돼야 하며, 지역 주민이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기농법에 의한 지역 특산물도 있어야 하고, 대형 마트나 패스트푸드점도 없어야 한다. 슬로시티로 선정되면 4년마다 재심사를 받는다. 가까운 일본은 슬로시티를 하나도 배출하지 못했다. 일본이 한 번에 20개 도시씩 두 차례나 슬로시티를 신청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일본의 농촌이 지나치게 현대화하고 서구화되어 지역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의 농촌은 이미 획일화된 풍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슬로시티를 여섯 곳이나 보유했다. 와우,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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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해운조합 <해운스케치>에 실린 원고입니다. 옮겨갈 수 없습니다.




2010/10/09 17:00 2010/10/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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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따라 잡기(3) : 인문학 열풍 ]



“인문학으로 길을 찾다”
- 인문학 열전…고전 읽기 열풍 -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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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화하고 있는 살구꽃과 유채(위), 산수유와 벚꽃(아래). 엄동설한을 견뎌낸 이 땅의 식물들이 봄의 무도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자연은 ‘나’와 ‘너’,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으며, ‘자아’와 ‘비아’, ‘몸’과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 Canon EOS D60 )



     2010년 봄. 복수초가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미니 겨울이 눈을 내리고 모랫바람을 뿌리며 시샘했다. 그랬건 말건 어김없이 생강나무가 싹을 내밀었고 진달래며 꽃다지들이 몰려나와 무대를 만들었다. 산수유를 시작으로 매화, 벚꽃이 캐스팅되고 봄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라이트 온(Light on). 하동에서는 산수유와 매화가, 진해와 지리산에서는 벚꽃이 프리마돈나로 등장했다. 냉이가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꽃잎을 밀어 올렸으며 텃밭에서는 유채꽃이 세상 구경을 나왔다. 엄동설한을 견뎌낸 이 땅의 식물들이 이렇게 봄의 무도회에 하나 둘 참가하기 시작했고 얼마 있지 않아 벌과 나비와 같은 곤충들이 무희로 등장할 것이다. 이 봄 무도회의 주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신이 인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 긍휼히 여긴다는 종교적인 사랑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타인 본위의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성적(理性的) 존재자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동질감인 ‘필리아’는 더욱 아니다. 이 사랑은  단순하다. 정애(情愛)에 바탕을 둔 정열적인 사랑, ‘에로스’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카오스(혼돈, Chaos)에서 태어난 태초의 힘이고, 인도에서는 우주만물을 잉태한 중심, ‘탄트라(Tantra)’다. 이 무도회가 끝나면 저마다 잉태를 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사랑은 정애(情愛)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배척하지 않으며 미워하지 않는다. ‘나’와 ‘너’,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으며, ‘자아’와 ‘비아’, ‘몸’과 ‘정신’을 구별하지 않아 서로 다투지 않는다. 이 무도회를 생물학적으로 보면 ‘공진화(共進化)’며, 철학적으로 본다면 ‘탈근대’이다.


   … 꽃이 벌을 부추겨서 자기를 찾아오도록 만들 듯이 진화는 인간의 의지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에 따르면, 진화는 거의 무의식이고 목적성이 없는 과정이다. 모든 생물에게 다 그렇듯이, 진화는 어떤 생물 종이 온갖 시행착오를 통해서 될 수 있으면 자기 종을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어떤 종이 보여주는 적응력이 워낙 뛰어나서 목적의식성이 개입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미가 자기 정원에 식용 균류를 ‘제배’한다거나, 낭상엽(단지나 통 모양의 잎. 주로 식충 식물이 벌레를 잡기 위해 발달한다) 식물이 자기 잎을 썩은 고기로 바라보도록 파리를 ‘설득’한다든가 하는 경우가 그런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이 매우 교묘하다는 것은 나중에 보니까 그런 것일 뿐이다.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계획이나 의도는 자연 선택에 따라 우연한 사건들이 중첩된 것일 뿐이다. (중략) 우리가 구사하는 문법으로는 세상이 능동적인 주체와 수동적인 객체로 나뉘지만, 공진화(共進化, 여러 개의 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진화하는 일)의 모든 관계에서는 객체가 주체인 동시에 주체가 객체이다. …

-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황소자리, 2007) 중에서


 
   이렇듯 땅 위에서 너와 나가 없는, 주체와 대상이 없는 봄의 무도회가 열리며 탈근대를 하고 있을 때 2010년 3월의 바다에서 우리나라 해군 군함이 침몰했다. 많은 사상자를 내었던 이 사건은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더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리 시대의 온갖 문제와 모순이 응집되어 나타났고 그 한가운데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너와 나라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 구조가 있었다. 땅 위에 찾아온 봄이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아를 구별하지 않는 ‘탈근대 철학’라고 한다면, 같은 시기 봄 바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나와 너, 주체와 대상으로 나눠며 대립하는 ‘근대 철학’이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였지만,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스피노자의 말처럼 ‘하나의 사실이 저마다 다른 양태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누구나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Cogito ergo Boom).

    과연 ‘나(우리)’는 사실(진실)을 알 수 있을까?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No’다. 아쉽게도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아’, 몸과 정신을 분리한 근대철학이 도달한 것은 ‘사실(진실)은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진실은 확인할 수 없다’는 이 명제는 데카르트, 로크, 흄으로 대표되던 근대철학을 위기에 빠트렸다. 칸트와 피히테가 헤겔이 위기에 처한 근대철학을 잠시 되살리는 듯 했지만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아’ 등 존재론적 구분으로 시작된 근대철학의 모순과 한계는 해결할 수 없었다.

     서양 근대철학의 행적이 그랬던 것처럼,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17세기 근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이 사건은 대립과 배척만 가속시켰다. 어쩌면 신형철의 말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하루에도 세 차례나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시대를 오가며 서성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사랑과 행복을 이야기 하다가, 오후에는 합리성과 효율, 경제 발전을 주장하며 사랑과 행복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저녁에는 ‘그래도 인간이다’를 외치며 일탈을 꿈꾸는 이 자아분열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 스핑크스가 묻는다. 아침에는 전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본질적으로 근대적 민주국가 만들기에 실패한 분단체제 하의 땅이다. 현상적으로 근대적 일상의 난마 속에서 허덕인다. 편집증적으로 탈근대의 정신적 우주를 유영한다. 이렇게 세 겹의 시간대가 착종되어 있는 곳이 우리 현실이다. 우리는 괴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 아픈데, 왜 아무도 병들지 않았는가. …

-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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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작물을 심고, 잡초를 뽑고, 곡물을 수확한다’는 이런 표현에서처럼 우리는 세상을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 우리가 구사하는 문법으로는 세상이 능동적인 주체와 수동적인 객체로 나뉘지만, 공진화(共進化)의 모든 관계에서는 객체가 주체인 동시에 주체가 객체이다.  ( Canon EOS D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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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아, 몸과 정신 등 사물을 대립 구조로 파악한 서양 근대철학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인문주의적인 가치로 채워져 있는 동양철학은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힘이 된다.  ( Canon EOS 5D )



    다행스럽게 최근 우리 문화계의 화두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밥 먹여 주냐”던 핀잔을 뒤로 하고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시민 아카데미, 기업 교육에서조차 인문학이 화두로 떠올랐다. 직장 내 위치가 불안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이들부터 실무에 필요한 지식 및 자기계발을 위해 찾는 직장인까지 최근 들어서는 기업 경영자들까지 인문학에 눈을 뜨면서 인문학 강좌를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내 욕망과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하겠다는 삶의 반성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반성이 이 땅에 인문학 열풍을 불게 한 것은 아닐까.

    인문학(人文學)이란 넓게는 정치/경제/역사/예술 등 인간과 인류문화에 관한 정신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좁게는 문학(文學)/사학(史學)/철학(哲學)의 세 범주를 일컫는 말이다. 문학이 현재의 징후를 포착하는 것이라면, 사학은 과거를 재조명해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며, 철학은 미래를 우리가 나아갈 바를 표시하는 등대와 같다. 인문학이 전근대, 근대, 탈근대로 분리된 우리 삶의 형식을 통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 현실적인 문제 제기의 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서양 문명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서구 문명의 기본적인 구조, 즉 과학과 종교라는 이원적 구조와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 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그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중략)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 2004년) 중에서




     사실, 주체와 대상으로 분리하여 시작되었던 서양 근대철학조차 이미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관계론’으로 탈근대했다. 데카르트, 로크, 흄으로 대표되던 근대철학이 ‘진리는 확인할 수 없다’는 자가당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위기상황에서 서양 철학을 구해낸 것은 동양철학이었다. 실제 서양철학을 구해냈다는 칭송을 듣고 있는 맑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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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노자의 도덕경이나 불경에 심취했다. 이들로부터 시작된 현대철학은 라캉과 알튀세르, 푸코, 가타리, 들뢰즈, 슬라보예 지젝으로 이어지면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대립적 구조가 아니라 전체를 통섭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서양에서의 철학이 대립 중심의 근대철학인 ‘존재론’에서 동양 철학과 사상에 맞닿은 ‘관계론’ 중심의 탈근대(현대)철학으로 발전해 가는 동안 스스로 동양 철학을 버리고 인문학의 가치를 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의 초입에서조차 17세기적 생각을 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다시 불어오고 있는 인문학 열풍. 그 열풍이 분열되고 대립된 우리 세계를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문학 서적 발간이 크게늘고 있다. 인문학은 분열되고 대립된 세계를 통합시키고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Canon EOS 400D )







* 이 글은 한국해운조합 사보에 게재될 원고입니다.





2010/04/09 20:17 2010/04/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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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Z글쓰기와 인문학 사이
- 한국공예문화진흥원 쇼핑몰 상품설명문 작업을 마치며 -


 

이우 곽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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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행복한상상에서 작성된 한국공예진흥원 쇼핑몰 상품 설명서. 상품의 기능과 효용, 가격 등 실용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동양사상, 넥타이의 기원, 민화(民畵)의 의미, 작가의 작품세계 등이 약술되어 있다. 상품 설명을 읽다 보면 잊혀졌던 역사와 전통 문화, 작가의 작품세계가 함께 읽힌다.



     ...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증식(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제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긍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과거의 어학 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 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 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와의 차이는 큽니다 ....

-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 200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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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돌베개, 2004년). 동양사상과 서양 근대 사상을 '관계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구성 원리'로 대비시켜 설명해 놓은 서론이 좋다. 이 책은 (주)행복한상상의 <백권가약> 프로그램 첫번째 대상 도서로 선정되었다.



     ‘I am a dog. I bark’가 신영복 교수가 말하는 서양 근대 사상의 ‘존재론적 구성’이라면, 천자문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은 동양의 ‘관계론적 구성’입니다. 현대성의 생활 원리인 전문성과 효율을 따진다면 언어를 가르치면서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라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서양의 존재론적 측면으로 이야기한다면, 숭례문(崇禮門)보다는 남대문이 편하고, 흥인문(興仁門)보다는 동대문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며 효율적입니다. 남쪽 문을 가리키며 구태여 우주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오행(五行)을 이야기하고 ‘예(禮)를 높이는 문’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쪽에 있는 문’, 혹은 ‘남쪽으로 나가는 문’이라는 것이 훨씬 실용적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음운과 음소, 문장이라는 언어 구성 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표상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어 자체의 구성 체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과 의미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에서 문장을 연결하는 기술적 측면이 중요한 것이라 아니라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더 중요하듯 언어교육에서도 언어 자체의 기능적인 측면보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와 관계를 설명하려는 우리의 관계론적 생활 방식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天地玄黃)’이라는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그 철자가 아니라 그 안에 철학을 담고 삶을 설명하려는 과거 우리의 생활 방식은 신영복 교수가 이야기하듯 ‘존재론적’ 생활이 아니라 ‘관계론적’ 생활입니다. 사물에 불과한 문(門)을 이야기하면서도 문(門)을 독립시켜 기계적 기능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와 우주의 구성 원리를 더해 그 정신적 의미를 담는 생활 방식은 인간과 과학이 대립하고, 인간과 경제원리가 대립하는 서구 근대화 사회의 모순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메타포가 됩니다. 그래서 니체와 헤겔이 동양사상에 심취했으며 그 뒤를 이어 받은 가타리와 들뢰즈 같은 현대 철학가들은 ‘차이의 철학’, ‘사건의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앞으로의 세계는 동양이 중심될 것이라는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문화(文化)는 생활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아, 몸과 정신을 분리하는 서구 근대의 모순된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 들이닥친 문화 충격에 비틀거리고 있는 셈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문화’의 의미마저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화된 존재론적 측면으로 인식해 개별적인 것으로 독립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 생활’이라는 말 속에는 ‘문화적이지 않은 생활이 있다’는 타자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문화 생활이 일상과 다르고, 문화와 경제가 다르고, 직장과 생활이 각기 별개로 독립되고 있습니다. 문화라는 포괄적인 개념조차 서구 근대 사상의 전형인 대칭적 구조로 파악하고 각각의 존재를 개별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 문화가 없다면, 그 문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문화의 상대어는 ‘자연’입니다. 자연이 불규칙한 랜덤(Random) 체계라면, 문화는 규칙이 있는 질서 체계입니다. 문화를 한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불규칙하고 랜덤한 자연을 글(文)로 표현해 변화(化)시킨 것입니다. ‘글’을 의미하는 ‘文’은 원래 바위에 바람이 스쳐 지난 간 자국 위에 덮개를 얹어 놓은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국이 생긴 것,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자국입니다. 불규칙한 자연물에 규칙을 더하고 질서를 잡아 놓은 것이 ‘문(文)’입니다. 그렇다면 문화(文化)란, 질서화, 혹은 체계화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화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닿아 체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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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원공사 중인 숭례문. 오행(五行) 사상에 따라 '예(禮)를 높인다'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으로 이름 지어졌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남대문(南大門)으로 개명되었다. 그래서일까. 이제 오행사상은 일부만 아는 전문 영역이 되어버렸다. (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아무리 좋은 문화라고 하더라도 잊고 지내면 사라지게 됩니다. 질서와 규칙성을 세워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지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돌보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풀이 자라고 허물어지듯, 생활 속에서 잊혀진 문화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동시대인과 동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인식 총체’라고 정의합니다. 동시대인, 동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와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사람들의 ‘문화’를 없애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민족문화 말살정책’, 현재 터키 정부가 전략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쿠르드족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그 좋은 예입니다. 특정 문화가 잊혀진다는 것, 혹은 사라진다는 것은 그 문화가 가진 패러다임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용과 효율, 전문성을 강조하는 현대는, 문화를 생활 속에 편입보다는 생활 밖으로 밀어냅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현대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체와 대상, 자아와 비아, 몸과 정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과 인문학, 과학과 예술 등 서양화된 대립된 개체들로 채워졌습니다. 삶이 주체나 객체, 몸이나 정신, 자연과학이나 인문학 그 어느 하나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려 관계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중 어느 하나만으로 설명하고 정의하려고 합니다. 경제는 경제로, 과학은 과학으로, 인문학은 인문학대로, 문화는 문화대로 따로 독립됩니다. 심지어 일과 생활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효용과 실리, 그리고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인문학으로 BIZ하다

     얼마 전 회사(주식회사 행복한상상, www.rws.kr)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의 전통공예 쇼핑몰(www.craftzum.com) 상품설명문 작성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번 1차 작업은 손자수 북마크, 옻칠 컵세트, 백자 머그컵, 화각반함, 보상화 3단 보석함 등 생활소품에서부터 벽걸이 솟대, 한복 색동 유리시계 등의 장식품, 태극 스카프, 화접도 스카프, 넥타이 등의 패션 소품 총 90개의 공예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분량이 A4 90페이지에 이릅니다.

    만약 존재론적 구성으로 본다면, 혹은 ‘실용’과 ‘효용’이라는 측면으로 이 상품을 설명한다면 상품의 외형과 재료적 특성, 그리고 상품 가격만을 나열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공예품대전 지식경제부장관상을 받은 남재경 작가가, 넥타이에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음양의 의미를 문양화했지만 존재론적 측면으로 본다면 그저 ’넥타이‘일 뿐입니다. 소재와 활용성, 가격만 명시하면 되는 상품입니다. ‘I am a dog. I bark’라고 표기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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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의 우주관과 정신세계의 근간인 괘(卦)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하여 프린팅한 남재경 작가의 <3괘 스카프> 상품 설명문. "괘(卦)는 음과 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변화하고 순환하면서 만들어내는 우주만물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양과 음의 순환 원리를 ‘태극’이라 하며, 그 순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건(乾, 하늘), 곤(坤, 땅), 감(坎, 물), 리(離, 불) 등의 괘입니다. 1괘에 각각 3효(爻)가 있고, 효(爻)를 음양(陰陽)으로 나누어 8괘가 되고, 이 8괘가 거듭하여 64괘가 되는데, 이것을 설명하여 놓은 책이 <주역>입니다. 괘는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창조와 번영의 과정을 상징합니다"라고 괘의 의미를 약술하고 있다.



     그러나 쇼핑몰 상품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 문화와 그 의미, 그리고 작가의 땀을 담아달라는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의 취지에 깊은 감흥을 받았습니다. ‘공예문화산업은 21세기 우리나라의 희망’이라는 모토답게, 쇼핑몰에 올라가는 상품을 ‘상품’으로만 보지 않고 우리의 전통 문화가 담긴 ‘작품’으로 인식하는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의 요청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상품 정보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은 의미를 풀어준다는 것은 존재론적 구성인 ‘I am a dog. I bark’형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구성인 천자문의 ‘천지현황(天地玄黃)’형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보석함인줄 알았는데 나전 명장인 작가가 건강과 풍요를 기원하며 호접도(胡蝶圖)를 새겨 넣고, 단순한 유리시계인 줄 알았는데 음양오행설에 따라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오방색(五方色)을 조각보처럼 이어 붙인 것을 안다면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상품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작가와 구매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문화 매개체가 될 것입니다. 일상에서 늘 옆에 두고 사용하는 상품의 기능을 할 뿐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은 물론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할 수 있습니다. 문화란, 그렇게 일상 속에 있을 때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BIZ글쓰기와 인문학 사이

     한국공예문화진흥원의 전통공예 쇼핑몰 상품설명을 최종 라이팅하면서 신영복 교수가 말하는 서양 근대 사상의 ‘존재론적 구성’ 패턴이 얼마나 우리 생활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지 실감했습니다. 불과 몇 십년 사이에 우리 생활이 ‘관계론적’ 생활이 아니라 ‘존재론’적 생활 패턴으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전문성과 효율을 위해 주체와 대상, 몸과 정신을 따로 독립시킨 서구화된 패턴 속에 있다 보니, 사람이면서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경제학자, 과학을 모르는 인문학도, 기계와 전자만을 아는 엔지니어, 과학을 모르는 예술가가 가득하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근대 이전의 예술은 예술과 기술의 복합 개념이었습니다. 예술을 뜻하는 ‘아트(Art)’라는 말은 라틴어 ‘아르스(Ars)’와 그리스어 ‘테크네(Teche)’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르스’는 예술이나 학술을 뜻했고, ‘테크네’는 기술, 즉 물건이나 집, 선박 따위를 만드는 기술 또는 땅을 측량하거나 청중을 사로잡는 기술을 의미했습니다. 오랫동안 기하학자의 공식이 화가의 그림과 동등한 예술적 가치로 인정되었습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는 수학자이자 문필가였고, 철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필가는 정치가이기도 했고 화가이기도 하였으며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그림에도 화가는 자신의 글이나 유명한 남의 글을 적어 넣어(낙구, 落句)를 적어 넣어 문필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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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중기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月下情人)>. 왼쪽에 '月沈沈夜三庚 兩人心事兩人知'라는 낙구(落句) 가 있다. '달빛 아래 어둑한 삼경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라는 뜻이다. (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이정명 소설 <바람의 화원> )


     이 개념은 로마 시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여명인 르네상스 때까지 이어져오다가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는 근대철학이 자리 잡으면서 예술과 기술, 과학과 인간이 분리되었습니다. 동양에서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서구문물이 유입되고 근대사상이 중심되면서 각각의 영역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서양의 근대 철학은 존재론적 주체 철학이 한계를 드러내자 관계론적 철학으로 전환하며 현대철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서구의 근대철학의 인식론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BIZ 글쓰기라고 하니 대부분 인문학이나 문학, 철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서구의 근대적인 시각인 존재론적인 측면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몸과 정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경제와 정치 등 어느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글쓰기 또한 그렇습니다. 경제서를 쓴다고 하여 경제학 이론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며, 시를 쓴다고 경제학을 담을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르는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일 뿐 그 안에는 언어가 표상하는 ‘그 무엇’이 담깁니다.

      BIZ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시를 읽고 들뢰즈와 가타리, 장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현대적인 영상광고 PD 박웅현이 ‘광고인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하고(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알마. 2009), 그래서, 생태학적인 특성만으로 식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과 인간, 식물과 곤충, 식물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식물학자 마이클 폴란의 책(욕망하는 식물. 황소자리. 2007)이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전문 서적이 아니라 실용적인 BIZ글쓰기를 하면서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하니 난감한 일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상관도 없이 보이는 것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니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BIZ글쓰기를 해야 하는 사람은 넓고 깊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좁은 골목길이 보이면 ‘공용 공간과 개인 공간의 완충지대’라는 것을 떠올릴 줄 알아야 하고, 운동화를 보면 새벽 한강 둔치에서 운동하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릴 줄 알아야 합니다. 공장에서 생산된 단순한 상품 하나하나에 사람을 담고 생각과 의미를 더한다면,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 사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 am a dog. I bark’가 아니라 ‘천지현황(天地玄黃)’입니다.



.....
* 이 글은 (주)행복한상상 웹 사이트(www.rws.kr)에 게재되었습니다.




2010/01/06 22:23 2010/01/0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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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따라잡기 ]


2009년의 화두(話頭) 소통, 그리고 포퓰리즘
- ‘소통’을 위하여 -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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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 체계가 복잡할수록 소통은 어렵게 된다. 포퓰리즘은 소통을 어렵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 세계가 자폐(自閉)적이라고들 흔히 말합니다. 그들과 소통하기 어렵다는 불평입니다. '소통'이라는 이 수상쩍은 말은 왜 이리도 당당할까요? 불평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 '소통'은 아마도 각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둘이 함께 확인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A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B에게 전달할 수 없고 B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A로부터 건네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

- 신형철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중에서


     출판계를 대표하는 매거진 <<기획회의>>는 2009년 출판계 키워드로 ‘소통’을 선정했다. 2009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중요한 키워드 30개를 선정했는데 ‘인터넷 소설’, ‘심리학 책의 진화’, ‘신자유주의 비판’ 등 무거운 단어들을 누르고 단연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문화계의 화두 역시 주저 없이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소통’이 2009년 화두(話頭)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불통’의 시대를 살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이 ‘소통’이라는 말은 왜 이리 당당한지 2009년의 우리는 ‘소통’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2009년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 <TV동물농장>에 ‘가출하는 개, 워리’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주인의 말을 알아듣고 충성스러운 진도개 워리가 어느 날부터 무단 가출을 시도한다. 워리는 자신을 묶어 놓은 목줄을 끊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탈출을 감행해 어디론가 사라진다.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목줄을 쇠줄로 바꿔보지만 며칠을 입으로 물어 끊어내고 달아나 버린다. 가출하는 개 워리를 잡기 위해 견주는 마을 방송을 통해 주민에게 알리고 워리는 번번이 주민들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오는 해프닝이 반복된다. 워리는 왜 가출을 하는 것일까? 제작진이 워리의 목에 카메라를 단다. 워리는 집을 가출해 마을 뒷산에 있는 암자에 오른다. 암자에는 같은 종의 암캐와 워리를 아빠로 둔 작은 강아지 너댓 마리가 함께 살고 있다. 두 시간을 달려간 워리는 자신의 새끼가 있는 견사 앞에서 새끼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가출하는 개 워리는 자신의 새끼들이 보고 싶어 무단 가출을 감행했던 것이다. 자식을 보고 싶어 줄을 끊고 탈출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견주와 마을 사람들에게 추적당하고, 심지어 새끼들을 보지 못한 채 체포(?) 당하기도 하는 워리….

     이것이 ‘불통’의 문제다. 워리가 자신의 처지를 견주에게 알릴 수 있었다면 워리는 당당하고 행복하게 자신들의 새끼에게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 한다. 사람들의 언어가 없고, 커뮤니케이션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워리에게 사람들의 언어가 있고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있다면 가능했을까? 변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견주나 마을 사람들이 워리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소통 도구가 있든 없든 여전히 불통의 문제로 남을 것이고 워리는 또 다시 가출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수천 년 전 말(言)과 그림으로 시작한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이제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나’의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블로거들이 커뮤니케이션의 바다를 항해하다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4개월에 한 번씩 휴대폰은 기능과 모양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워리처럼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 통신 수단은 빠르고 다양해졌지만 신형철의 말처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전달하려 하거나, 혹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전달 받았다. 또 이문재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극심한 소통의 인플레이션에 살고 있어 전달하고 받았지만 다른 의미로 뒤틀려 있었던 것이다.


     ... 매번 통사정을 해야 한다. 첫 문장 쓰기가 첫사랑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힘들다. 그것도 갈수록 힘들어진다. 내가 제대로 게으르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언어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탓이리라. 홀로 서지 못하는 의미들이 너무 많다. 사랑은 참사랑으로, 천연은 순수 100퍼센트 순수 자연산으로, 원조는 진짜 원조로, 자유는 자유로운 자유로, 느림은 정말 느린 느낌으로…. 의미가 중첩될수록 원래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강조의 역설’이 글쓰기를 무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언어는 비만인데, 정작 의미는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중략) 땅끝 마을에 가본 적이 있다. 땅의 끝. 길의 끝. 거기에서 바다가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땅끝은 땅의 끝이 아니었다. 땅끝에서 돌아서면, 돌아선 그 자리가 땅의 처음, 땅의 시작이었다. 이 산만한 산문들이, 문명의 급소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 어수룩한 글들이 제발 글의 끝, ‘글끝’이면 좋겠다. ...

- 이문재의 <<이문재 산문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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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와는 다르게 내용은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 ‘1만 시간의 법칙’으로 런칭된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 ‘1만 시간 노력하면 성공한다’가 아닌 1만 시간의 법칙? 소통을 방해하는 포퓰리즘의 사례다.(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소통’을 이야기하지만 ‘소통’이 무엇인지 모르고, ‘문화’를 이야기하지만 ‘문화’가 무엇인지 모르며, ‘네트워크’가 ‘인맥’으로 해석되고, ‘원조’, ‘진짜 원조’로도 모자라 ‘정말 진짜 원조’라고 이야기해야 하며, 인문학 서적이 ‘호모 에로스’로 타이틀을 붙이고, ‘1만 시간의 법칙’이 1만 시간 노력하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1만 시간 노력해야 성공할까 말까라는 의미가 되는 극심한 소통의 인플레이션, 혹은 이 극심한 포퓰리즘(populism, 인기영합주의, 대중영합주의)의 시대에 과연 ‘소통’이 가능하기나 할까?

    ... 등대는 저마다의 고유한 신호를 쏘아대며 등대 자신의 위치를 선박에게 가르쳐 준다. 여기는 선미도, 여기는 속초, 여기는 울릉도, 여기는 오륙도라고 등대들은 밤새도록 깜박이며 외친다. 그래서 이 세계의 등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신호체계를 갖게 된다. 항해사는 등대의 위치와 등대의 이름을 알아야 비로소 바다 위에 뜬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내 밖에 존재하는 타자의 위치와 그 타자의 이름을 알아야만 나는 나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등대는 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깜박인다. (중략)

     항구가 가까워질수록 바다 위에는 더 많은 신호가 나타난다. 수로를 알리는 부표, 암초의 존재를 알리는 등표, 왼쪽 항로의 위험을 알리는 표지나 오른쪽 항로의 위험을 알리는 표지들이 물 위에 깔려 있다. 항해사는 이 모든 신호를 연결시켜 가면서 항구에 닿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신호가 가장 아름답다. 신호는 나 자신을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자의 슬픈 울음과 같다. 그 신호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의 상대성을 긍정할 때, 선박은 대양을 건너가고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고 자전거는 산맥을 넘어온다. (중략)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를 따라서 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가면서 대양을 건너갈 수 있다. ...

- 김훈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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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남해도 등대 : 등대는 저마다의 고유한 신호를 쏘아대며 등대 자신의 위치를 선박에게 가르쳐 준다. 여기는 선미도, 여기는 속초, 여기는 울릉도, 여기는 오륙도라고 등대들은 밤새도록 깜박이며 외친다. 그래서 이 세계의 등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신호체계를 갖게 된다. (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바닷길을 가는 뱃사람에게 ‘소통’은 생명과 같다. 등대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빛을 발산하거나 이곳 저곳 자신을 세우고 신호를 보낸다면―포퓰리즘에 빠진다면―배는 항구에 닿을 수 없다. 등대라는 하드웨어적인 기술도 필요하지만, 정확한 매뉴얼의 사용이 필요하듯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뿐만 아니라 소통하려는 사람의 지식과 바른 가치관이 필요하다. 소통의 툴인 ‘언어’와 ‘의미’를 포퓰리즘에 빠져 남용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가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절약은 경제적 행위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다가오는 2010년에는 제발 소통의 인플레이션, 소통의 포퓰리즘을 줄이고 ‘불통’의 끝, ‘소통’의 시대가 되면 좋겠다.


.......
*이우 : 복현문학상 수상(소설/평론 2개 부문). 강변시인학교 詩 <강변에서> 당선. 현재 독서경영회사 (주)행복한상상 팀장으로 일하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저서로 <언어는 눈부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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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해운조합 사보 <해운스케치>에 게재될 원고입니다.
**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2009/12/06 20:13 2009/12/0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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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Briefing ]


나쁘거나, 혹은 더 나쁘거나

- 인문학의 시각으로 바라본,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은 경제학자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나쁜 사마리아인의 행위’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다.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나쁜 사마리아인>>은 경제학 서적이다. 개발도상국에게는 신자유주의경제체제보다는 보호주의경제체제 성향을 가진 <유치전략>이 맞다고 논거하고 주장하는 책이다. 그의 의견은 탁월하다. 보호냐, 혹은 개방이냐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사를 바라보는 그의 식견 또한 탁월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볼 수 있는 학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제학자다. 그러나 경제학자고, 경제학 서적일 뿐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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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Canon EF 50mm + Computer Aid )


        … 내게는 여섯 살 난 아들이 있다. 이름은 진규다. 아들은 나에게 의존하여 생활하고 있지만, 스스로 생활비를 벌 충분한 능력이 있다. 나는 아들의 의식주 비용과 교육 및 의료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만, 내 또래의 아이들 수백 명은 벌써부터 일을 하고 있다. 18세기에 살았던 다니엘 디포는 아이들은 네 살 때부터 생활비를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뿐인가. 일을 하면 진규의 인성 개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는 지금 온실 속에서 살고 있기에 돈이 중요한 줄 모르고 지낸다. 아이는 자기 엄마와 내가 저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한가로운 생활을 보조하고 자신을 가혹한 현실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에 대해 전혀 고마움을 모른다. 아이는 과잉보호를 받고 있으니 좀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경쟁에 노출시켜야 한다. 아이가 경쟁에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노출될 수 있도록 미래에 아이의 발전에는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아이는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고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아이에게 더 많은 직업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아동 노동이 합법적이거나 최소한 묵인이라도 되는 나라로 이주를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 귀에는 여러분이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이 짧다고 . 매몰찬 사람이라고. 여러분은 나에게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여섯 살 먹은 아이를 노동 시장으로 몰아넣는다면 아이는 약삭빠른 구두닦이 소년이 될 수도 있고, 돈 잘 버는 행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뇌수술 전문의나 핵물리학자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일 아이가 그런 직업을 가지려면, 내가 앞으로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보호와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단순히 세속적인 관심에서 보아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아 절약되는 돈을 보고 히죽거리는 것보다는 아들의 교육에 투자를 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말할 것이다. …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나쁜 사마리아인>> p107 )

     그래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경제체처럼 자신의 여섯 살 난 아들 진규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무역경제체제처럼 아이를 보호하고 교육해 의사나 변호사, 혹은 그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더 많은 재화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라나는 진규, 혹은 개발도상국에 더 적합한 경제체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주의경제체제로 성장한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을 향하여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나쁜 사마리아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들 진규를 자유경쟁체제에 내보내 일을 시키라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자는 ‘나쁘다’. 그럼, 아들 진규가 더 많은 재화를 습득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교육하라고 말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인가? 정작 중요한 것은 빠져 있다. 일을 하거나, 혹은 교육받아야 하는 진규 자신이다. 진규는 행복할까, 혹은 기뻐할까, 슬퍼하지는 않을까라는 문제…. 진규의 ‘행복’이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빠져 있는 것이다. 보호무역체제에서 우리는 행복할까, 혹은 신자유주의제제에서 더 행복할까.


    행복의 관점을 재화 획득으로 놓고 본다면, 더 많은 재화를 획득하게 하는 체제가 더 좋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 성장의 관점으로 놓고 본다면 더 많이, 빠르게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체제가 더 좋은 것이다.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에서 <보호무역주의체제>를 조금 비튼 <유치전략>을 답으로 내놓았다. 탁월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장하준은 경제학자다. 그것뿐이다. 그러나 아들 진규의 입장에서 본다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나 보호무역주의나 혹은 유치전략이나 모두 나쁠 수 있다. 진규는, 일할 것이냐(신자유주의) 아니면 20여년 넘게 따분한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보호주의)를 선택해야 하는 가련한 처지다. 나쁜 것과 더 나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진규….

     진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많은 경제학자들은 ‘대안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쁜 것 중에 덜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우리 모두 불쌍한 진규가 되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 식으로 말하자면, 보호주의나 신자유주의라는 <홈 패인 공간>1)을 파 놓고 그 안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 안에서 선택하라는 것이다.

    어느 한 사회의 경제체제는 경제 성장을 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 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이냐를 고민했던 것이 현재 우리 세계를 대별하고 있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경제체제다. 현대 국가와 현대적 경제체제(자본주의, 사회주의) 생성의 기본 이념이었던 존 로크(John Locke)는 그의 저서 <<통치론>>에서 ‘대지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부양과 안락을 위해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

    … 대지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부양과 안락을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지에서 자연적으로 산출되는 모든 과실과 거기서 자라는 짐승들은 자연발생적인 작용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인류에게 공동으로 속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자연적인 상태에 남아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지배권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용하도록 주어진 이상, 그것들을 특정한 사람이 일정한 용도에 맞게 사용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수취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 (중략) … 비록 대지와 모든 열등한 피조물은 만인의 공유물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신(人身)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그 사람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연이 제공하고 그 안에 놓아 둔 것을 그 상태에서 꺼내어 거기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 그 자신의 것을 보태면,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것은 그에 의해서 자연이 놓아둔 공유의 상태에서 벗어나, 그의 노동이 부가한 무언가를 가지게 되며, 그 부가된 것으로 인해 그것에 대한 타인의 공통된 권리가 배제된다. …

( John Locke의 <<통치론>> 제6장 중에서 )


     이렇게 존 로크에 의해 현대적 소유(所有)의 개념이 발생하고 그 소유를 개인 권리로 인정함으로써 자본주의가 태동되었다. 다른 한편에서 이 사상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일군의 사상가(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사회주의가 만들어지고, 우리 세계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깊은 홈이 패였다. 그 어느 것이든 모두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걸었던 행보였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보호주의경제체제, 자유주의경제체제,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길을 걸어왔다(우리에게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안인들>>은 신자유주의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려던 이 경제시스템은 어느 순간 행복이 아니라 경제 성장이라는 하위의 목적지에서 멈칫거린다.


    …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 이익 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지 알지 못 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시킨다. …

(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


    사람들은, 행복이 아니라 이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또한 성장과 이익, 국부라는 목표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사는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또한 행복이 아니라 성장과 이윤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며 이에 따라 ‘자유’라는 본래의 의미마저 사라져 버렸다. 국부(國富)를 위해 자유무역협정에 조인한 국가는 ‘개방’이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는 ‘폐쇄’라는 그 이중의 잣대. 그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우리는 장하준의 아들 진규와 다르지 않다.

     장하준이 대안으로 내세운 <유치전략> 또한 마찬가지다. 장하준이 서술했던 것처럼 보호주의나,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모두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방’과 ‘패쇄’ 사이 장하준이 대안으로 제시한 <유치전략> 또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국부(國富)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명한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어서 사회구성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또 다른 차별을 받을 수 있다. 중점 특정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소유권을 박탈당하여야 한다. 나쁘거나, 혹은 더 나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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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Computer Aid)


     과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경제체제는 성장과 이익, 국부(國富)만을 위한 것인가.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1886~1964)는 자신의 역저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 of Our Time)>>2)에서 트로브리안드 군도 주민들의 기이한 교역 풍속을 소개한 바 있다. 한 쪽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사는 주민에게 흰 조개껍질 팔찌와 붉은 조개껍질 목걸이를 선물하기 위해 10년이 걸릴지 모르는 항해를 떠나면, 다른 쪽에서도 반대 방향으로 비슷한 항해를 떠나는 전통이 그것이다. 이 항해는 재화를 교환한다는 점에서 교역임이 분명하지만 호혜의 원리를 따른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윤 추구를 위한 오늘의 투자협정과는 너무나 다른 이런 교역을 문화인류학은 <선물경제> 또는 <상징적 교환>이라 명명한다. 여기서 교환되는 것은 화폐, 이윤이 아니라 사랑, 존경, 연대 등이다.

     파트너에게 줄 선물을 싣고 10년이 걸릴지도 모를 항해를 떠나는 트로브리안드 주민. 오늘의 자유무역 관점에서는 말이 되지 않으나 상징적 교환은 인류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웃 마을에서 초대한 손님이 더 이상 먹지 못해 토할 때까지 음식물을 대접하기 위해 북태평양 연안 인디언들이 경쟁하듯 벌인 ‘포틀래치’라는 잔치도 한 사례다.

     경제적 이성이 이런 행위를 ‘합리적’이라고 할 리는 없다. 그러나 환경에 따라서는 이윤 창출 방지가 오히려 생존의 지혜가 되기도 한다. 아프리카 피그미족은 누가 큰 수확을 올리면 칭찬은커녕 질책부터 했다고 한다. 사는 곳이 척박하여 개인이 사적으로 땅의 생산력을 착취하면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처한 환경은 어떠한가? 교역과 교환이 경쟁적으로 일어나서 과잉생산이 부추겨지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모두 경제적 이성에 충실한 나머지 상품교역과 화폐교환에 눈먼 결과라 하면 과장일까?

     폴라니는 경제가 사회를 지배할 경우 사회 자체가 해체된다며,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된 뒤 기근이 더 자주 들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과거에는 홍수나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도 신분에 따른 의무, 씨족적 연대, 곡물시장 통제 등이 대규모 아사를 막아주었지만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자 그런 사회적 안전망이 해체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경제주의라고 부르는 경제학은 20세기 중반의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다. 인간이 직면한 희소성의 현실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하느냐는 형식론적 문제 설정이 신고전파의 경제 문제이다. 즉 경제 문제는 합리적 선택 내지는 계산의 문제인 것이며 그러한 논리는 수학적 차원 수단의 문제로 환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폴라니는 경제가 곧 최적화라는 신고전파의 경제 개념을 부인한다.

     “경제학은 사람을 ‘경제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으로 추상한다. 그러나 이는 서구에도 없는 동물이다. 아무데도 없는 경제인간이라는 허깨비가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데에서 경제학은 출발한다. 사람의 살림은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만큼 경제도 사회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폴라니의 생각이었다. 경제는 사회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당연하고 시장사회의 문제는 경제가 사회에서 벗어나는 데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3). 그 실체적 의미는 간단히 말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연과 동료들에게 의존하는 것이고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윤 극대화와 국부(國富)에 초점이 맞춰진 자본주의 시장경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여기에 케인즈의 경제이론에 울고 웃는, 그러면서 그 시스템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으며 살고 있다. 그 사이에 장하준의 <유치전략>이 들어 있다. 이러한 시장경제가 적어도 지구의 반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가?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대안이 뭐냐고. 그래서, 우리의 경제시스템을 포기자하는 것이냐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경제학은, 경제시스템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한 환경의 일부분이고 그 일부분에 집착하여 정작 소중한 우리의 행복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오늘날의 서구 산업사회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전체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의 독특한 창안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와 경제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호주의,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유치전략 어느 것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은 경제 성장이나 국부,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행복’이 기준 되어야 한다고. 재개발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충분히 설득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인간과 생명 중심의 경제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이미 깊게 패인 자본의 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인 이문재의 말처럼 초인적인 힘이 있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내 삶을 내가 선택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행복의 기준’이 다양화되었으면 좋겠다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을 하면서도 굶지 않고,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도 굶지 않고, 글을 쓰고 노래를 불러도 굶지 않는 경제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그러면서 행복하고 싶다고….

     “우리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We are not civilized enough to be communists).”

( 올리비에로 토스카니 )


 

註)
1)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의 하나>에 나오는 개념이다. 삶에는 기하학적인 공간, 물리적적인 공간, 도시 공간, 논리적 공간 등 많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공간 종류가 아닌 공간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2) 칼 폴라니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출생하여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자랐다. 폴라니는 부다페스트 대학 시절(법학 전공)인 1908년, 헝가리의 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 문화운동을 주도한 <갈릴레이 써클 Galilei Circle>을 창립하여 초대 위원장을 맡았으며,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빈에서 <오스트리아 대중경제(Der Osterreichische Volkswirt)>를 편집하다가 파시즘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이주하고 노동자교육협회(Worker's Educational Association의 강사 등으로 활약하였다. 폴라니는 1940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3년간 미국 베닝턴 대학에서 체재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주저인 <<거대한 변환: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1944년 초판, 1957년 제2판 출간)이 이때에 저술되었다. 그후 잠시 영국으로 나왔던 그는 1947년부터 미국 컬럼비아(Columbia) 대학에서 객원 교수로 ‘일반 경제사’를 강의한 후, 1953년 66세로 교직을 떠난 뒤 작고할 때까지 정력적인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말년에 <<공존 Co-Existenc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공존>>은 정치학과 경제학의 비교연구를 위한 학제적 잡지로서 “인간 조건의 불변성과 문화적 차이의 실체에 대한 지식을 통해 세계 평화에 헌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3) 박현수(영남대 경제인류학 교수)의 <<거대한 변환>>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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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주)행복한상상 rws Institute 책통자 집중과정 Book Briefing용으로 쓰여졌습니다.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2009/10/18 18:25 2009/10/1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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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따라잡기 ]


‘매끄러운’ 공간으로 길 떠나기
- 이 시대의 메타포, ‘홈 패인 공간’에서 ‘매끄러운 공간’으로-


(c)Copyright by Mudbull

▲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한비야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 <홈 패인 공간>은 자동차길이나 수로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선 오직 주어진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 옆으로 '샐'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학교 교육이나 공무원 체제가 거기에 해당된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단일한 방식으로만 행동하게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거나 아니면 낙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인 <홈 패인 공간>의 속성이다. 그에 반해, <매끄러운 공간>은 초원이나 사막처럼 홈이 없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서 사방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 아이스링크장이나 알래스카의 설원을 연상하면 된다 …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중에서


     육지와 바다를 환경학적으로 바라본다면, 육지는 바다에 비해 매우 척박하고 황량하다. 육지에 사는 생물은 더위와 추위, 비와 바람, 뜨거운 햇빛에 견뎌야 하는 것은 물론 생명에는 필수적인 물을 얻기 위해 생명마저 걸어야 하는 척박한 곳이다. 반면에 바다의 생물들은 육지에 비해 온도 차가 없고 비와 바람, 뜨거운 햇빛에도 덜 민감하고 육지보다 먹이 얻기가 용이하다. 환경이 좋기에 바다에 사는 생물들은 새끼를 배 속에 안기보다 알을 낳아 바다에 풀어 놓는다. 그러나 육지의 동물들이 이처럼 했다가는 종족 보존이 불가능하다. 천적이 너무 많고 가뭄과 기근에 시달려야 하고, 먹이를 얻기 위해 딱딱한 땅 위를 내달려야 하는 육지동물에게 알 낳기는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은 새끼들을 배속에서 낳고, 그것도 모자라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배 안에서 키워내는 것이다. 포유동물의 탄생이다. 어느 미국의 생물학자는 ‘고래는 바다의 풍요로움을 찾아 육지를 떠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여간, 그리하여, 그래서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은 고단하다.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드러다 본다면, 육지가 <홈 패인 공간>이고 바다는 <매끄러운 공간>이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의 하나>>에 나오는 개념이다. 삶에는 기하학적인 공간, 물리적인 공간, 도시 공간, 논리적 공간 등 많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공간 종류가 아니라 공간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자동차길이나 수로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홈 패인 공간> 속에서 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나가거나 혹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전후좌우 어디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어떨까. 수직적인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면 병원에서 나고 학교 가고 취업하고 자식 낳고 집 장만하고 그러다가 늙고…. 수평적으로 본다면 도로의 방향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고…. 수직?수평으로 바라봐도 확연히 <매끄러운 공간>이 아니라 <홈 패인 공간>이다. 뜨거운 여름날의 휴가도 매끄럽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홈이 패여 있다. 어디 가서 무얼 먹고 어느 곳에서 잔다는 등 깊게 홈을 파고 그 안으로 다녔다. 여행이 아니라 관광을 하며 편안했다. 그래서, 행복했을까. 행복하든 하지 않든 누구인들 홈 패여 있고 싶겠는가. 어디든 나아가고 싶었던 젊은 날이 있었으나 척박한 환경들이 홈을 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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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한비야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  고미숙은 인문학적 사유를 따라 ‘열하’까지 갔다 왔고 한비야는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아 ‘바람의 딸’이 되어 돌아왔다. (Canon EOS 5D / Tamron 17-3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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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김씨 표류기>>. 한강 밤섬으로 들어간 김 씨는 영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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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신안군 증도의 <<신안갯벌 소금축제>>. 지역마다 특색 있는 체험학습행사를 마련해 ‘홈 패인 공간’의 사람들을 ‘매끄러운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그래서일까. 이제 사람들이 <매끄러운 공간>으로 발을 내딛고 있다. 고미숙은 인문학적 사유를 따라 ‘열하(熱河, 중국의 리허)’까지 갔다 왔고 한비야는 늦은 나이에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아 ‘바람의 딸’이 되어 돌아왔다(한비야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 자의든 타의든 한강 밤섬으로 들어간 김 씨는 영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 표류기)>>). 어찌 영화나 책뿐이겠는가. 책상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체험학습>이라며 길을 나서고 지역마다 특색 있는 체험행사를 마련하면서 마침내 사람들은 ‘아이 쇼핑’이나 ‘관광’이 아니라 유목민이 되어 <매끄러운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제, 체험이 없는 여행은 그야말로 ‘앙코 없는 찐빵’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홈 패인 공간>에 살다 보니 아직은 많이 서툴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쪼그려 앉아서는 일을 보지 못한다. 길을 벗어나면 두렵고 무작정 기다린다는 일이 무섭다.

     뜨거웠던 올 여름, 나는 전남 신안군 증도라는 작은 섬 위에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달리고 섬과 섬 사이 바다 다리를 건너며 나를 그 먼 곳으로 부른 것은 이 바다에 펼쳐진 소금밭(염전, 鹽田)이었다. 바닷물은 25일 동안 햇빛 아래 말라 소금꽃을 피우고, 꽃잎을 떨구며 응고되면서 소금으로 태어난다. 나는 그 먼 바다로 와서 폭염 아래 피는 소금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했다. 동행자는 더운 여름날 그늘 하나 없는 이곳에 와서 뭘 하느냐며 허탈해 했다. 내가 폭염 아래 소금이 꽃을 피우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소금판매소에 가서 소금을 사고 있었다. 더운 물도 안 나오는 척박한 환경. 마침내 할 일이 없어진 그녀의 채근에 나는 그 원시의 바다를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을 하며 소금밭의 이미지를 담고 돌아 왔으며, <홈 패인 공간>에 익숙한 그녀는 ‘관광’을 하며 소금 포대기를 안고 돌아왔다.

      아직은 닫힌 공간에 익숙하고, 아직은 길 떠나기에 서툴지만 마침내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길을 떠나고 있다. 땅 위의 물류가 바다와 하늘로 흐르듯, 사람들이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가듯, 홈 패인 우리의 마음도 매끄러워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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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해운조합 사보 <해운스케치>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2009/09/09 10:05 2009/09/0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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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의 시대, 김훈은 무엇을 말하는가
- 소설 <<남한산성>> -




  
     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알려지지만,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다. 선후를 따지자면 작가 있고 작품이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은 독자로서는 잊어버리기 쉬운 것 중의 하나다. 독자는 작품을 읽지 작가를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에 작품에는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 책읽기란 단순히 글자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읽는 것이며, 글쓰기란 글자를 단순히 배열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을 표기(表記)하는 것이다. 말하기 또한 말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선후로 따지자면, 화자나 작가의 생각이 먼저 있고 언어(言語)가 배열되는 것이다.

    그러나 속을 보는 것보다 겉을 보는 일이 쉽다 보니 생각보다는 언어의 배열에, 사람의 됨됨이보다는 외모에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소설 <<남한산성>>은 어떨까. 단순히 소설이라는 겉을 본다면 그리 잘 된 소설이 아니다. 아리스트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극적인 요소가 없고, 선과 악이 구분되어 빚어지는 갈등 구조도 없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며 분명한 사건 전개와 결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남한산성>>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매력은 소설이라는 겉이 아니라 문장 속에 있다. 그 문장 안에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고스란히 묻어 있고, 그 시각이 차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은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일러두기’로 시작한다. 김훈은 ‘허송세월 하’듯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놀’았고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 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치는 것을 보았다고 적는다. 그렇게 김훈은 수백 번 산성에 오르내리며 역사보다 더 사실적인 소설 <<남한산성>>을 완성한다. 스스로 ‘놀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 오르는 일이 그의 말처럼 녹녹한 일이 아니다. 김훈은 산성을 오르기 위하여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비 오듯 땀을 흘렸을 것이며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 김훈은 무엇을 말하기 위하여 산성을 오르내리고 지우개로 고쳐가며 한줄 한줄 문장을 쓰고 <<남한산성>>을 완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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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다.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의 편이다. ...”

-<<소설 남산산성>> 머리글 중에서


     소설이 완성되고 김훈은 이렇게 자신의 소설에 머리글을 단다. 이처럼 그는 주전파나 주화파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쫓겨 가는 능력 없는 임금도, 그 뒤를 울며 따르는 백성도, 울며 늙은 사공의 목을 베는 김상헌도, 승리한 청나라의 전리품이 되어 잡혀가면서도 수레 위에서 손을 흔드는 아낙네와 양반집 규수들 그 어느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그 모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의 머리글에서처럼 그들 모두가 ‘고통 받는 자’이고 김훈은 ‘고통 받는 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올 만큼 치열했던 주전과 주화의 역사적 논쟁에서 작가 김훈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 김훈이 이와 같은 세계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훈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가치를 알며, ‘정신’이 아니라 ‘몸’을 존중할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지우개로 고쳐가면서 연필로 원고를 쓰고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그는 스스로 ‘생태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훈은 ‘몸의 고단함’을 아는, 어느 누구보다 더 치열한 생태주의적 세계 인식을 갖춘 작가임이 분명하다.


     “...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저어갈 때에나 내 두 다리의 힘으로 새벽의 공원을 어슬렁거릴 때 나는 삶의 신비를 느낀다. 이 신비는 내 살이 있는 몸의 박동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므로 신비라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중략) 내 몸은 바퀴를 통해서 대지와 교감한다. (중략) 그래서 바퀴는 기계가 아니라 내 몸의 일부이며 새롭게 확장된 나 자신의 몸이다. 나는 바퀴와 친숙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남이다. 이 거리는 아름답다. 이 거리는, 나와 세상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상을 연결시켜 줌으로 나를 넓히고, 내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 김훈 에세이, <인간의 다리와 바퀴 사이의 사유> 중에서


    김훈은 그의 에세이집 <<자전거여행1>>에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아갈 때 ‘두 다리의 힘’과 ‘몸의 박동’에서 ‘대지와 교감’하고 구체적인 삶을 느낀다고 적고 있다.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1>>에서의 이런 인식은 <<자전거여행2>>에서는 정신 노동이 아니라 육체 노동을 부러워하는 모습으로, 더 나아가서 마침내  ‘러브의 익명성’을 받아들일 줄 알고 일부일처제를 ‘억압’이라고 표현할 만큼 도덕과 윤리의 관념에서조차 자유로워진다.


    "... 목수들은 허리춤에 여러 가지 연장을 차고 있었다. 젊은 목수들의 연장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망치질이며 톱질과 대패질은 행복해 보였다. 세상의 재료들을 재고, 자르고, 깍고, 다듬어서 일으켜 세우고 고정시키는 자들의 기쁨으로 그들의 근육은 꿈틀거렸고, 날이 선 연장들은 햇빛에 빛났다. 아아, 연필과 지우개는 죽어 마땅하리라. "


- 김훈,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중에서

    “ 러브호텔의 주차장 입구는 비닐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대낮에도 주차장은 자동차들로 가득 차 있다. 비닐커튼 밖은 인도다. 그 인도 위로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비닐커튼은 자동차를 가려서 러브의 익명성을 보호하는 장치다. ...(중략)... 혼내 정사건, 눈먼 치정이건, 다급한 간통이건, 매춘이건 간에 러브의 익명성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간통과 치정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의 존엄을 편든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중략) 러브호텔이 창궐해서 성업 중인 사태의 문명사적 배경은 이 시대의 도덕이 특별히 타락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중략) 아마도 러브호텔이 창궐하게 되는 배경은 인간이 일부일처제에 승복할 수 없는 마음의 바탕을 지니고 오랜 세월 동안을 일부일처제의 억압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 ”

- 김훈 에세이, <10만년 된 수평과 수직 사이에서> 중에서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 ‘정신’이 아니라 ‘몸’을 존중할 줄 아는 김훈이 몽진과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가 있었던 남한산성을 바라본다면 주전과 주화라는 이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신화, 백성의 고단했던 삶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김훈에게 남한산성은 전쟁의 현장이 아니라 당 시대를 살아간 자의 고통이 담긴 현장이었고 그래서 슬픈 현장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치욕을 긍정하고, 인조를 따라 내려갔던 시녀들의 통곡을 긍정하고, 주화파와 주전파 그 모두를 긍정할 수 있다.


     “... 남한산성의 서문(西門)은 처연하다. 산성 내의 수많은 용루와 옹성과 전각들 중에서 서문은 가장 비통하고 무참하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중략) 서문은 남한산성의 4개 대문 중에서 가장 외지고 작아서 출입구는 높이가 210센티미터, 폭은 140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성벽이 산비탈을 따라 낮게 내려간 골짜기에 이 서문의 출입구는 군사들이 성벽 안팍을 은밀히 드나들던 암문(暗門)처럼 보였다.(중략)

     1637년 1월 30일(음력) 새벽에, 인조는 세자를 앞세우고 서문을 나섰다. 도성과 대궐을 적에게 내주고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와 농성을 시작한 지 47일 만에 인조는 다시 산성을 버리고 치욕의 투항 길에 나섰다. 농성은 희망이 없었고, 기약이 없었고, 대책이 없었다. (중략) 왕은 곤룡포를 벗고 청나라 군대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청태종이 요구한 투항의 패션이었다. (중략)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언어의 전쟁은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 간의 논쟁이었다. 그것이 47일 동안에 남한산성에서 벌어졌던 싸움의 핵심부였다. 성 밖은 기마부대와 포병부대를 선봉으로 삼는 25만의 적병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그들의 목표가 아주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어도 사직과 백성과 국토의 보존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해 선택해야 하는 길은 정반대롤 갈라졌다. (중략)

     나는 투항으로써 나라를 지켜낸 인조의 치욕을 긍정한다. 나는 투항하는 임금의 뒤를 따라 눈 쌓인 산길을 걸어 내려갔던 시녀들의 통곡을 긍정한다. 삶이 불가능할 때, 영광보다도 치욕을 내포하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가르쳐준다.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가르쳐준다. 삶이든, 역사든, 오로지 온전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

- 김훈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2>>(생각의 나무, 2007) 중에서



    소설 <<남한산성>>의 매력은 이와 같은 작가정신에 있다. ‘정신’이라는 추상성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라는 구체성을 가지고 그 가치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는 과학과 문명, 기술이라는 구체성을 발전시키면서도 추상성을 가진 정신을 긍정하고 구체성의 총체인 ‘몸’을 부정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 사회와 서양 중심의 문화 영역에서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매우 기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좌와 우, 보수와 평등, 경쟁과 평등,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그 모든 것은 삶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요 관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의 행복을 위해 주장되는 이러한 이념과 관념에 집착하여  ‘투신자살하라’는 말을 서슴없이 외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정신’을 위해 ‘몸’을 버리는 이 기형의 모습은 역사적으로는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는 좌우 논란을 불어 일으키며 불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 <<남한산성>>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이즘과 관념, 윤리와 도덕, 그 모든 것의 앞에 ‘삶’과 ‘생명’이 있다는 것을 소설 <<남한산성>>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삶’과 ‘생명’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주전과 주화, 좌와 우, 모두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 작가 김훈은 수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산성을 오르내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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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북 브리핑>을 위한 교육 자료로 쓰여졌습니다.
    ** 무단 복제 및 전제를 금합니다.

2009/08/21 12:55 2009/08/2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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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논리(論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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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전남 신안군 증도_ 태평염전 )


     글쓰기는, ‘글’이라는 길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내가 ‘글’이라는 길 위에 있을 때 글쓰기가 되고 ‘소리’라는 길 위에 있을 때 ‘음악’이, ‘형태와 색채’라는 길 위를 걸어갈 때 ‘미술’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길’이란 자연적으로 저절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되지 않고 풍경 속의 형태와 색채가 모두 미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미술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글’의 도구가 되는 언어(言語)는 체계적으로 조합된 질서 체계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인위적인 것이다. 형태소가 모여 형태언이 되고 문장이 만들어진다. 문장은 접속사로 연결되어 길어져 문단을 만들고, 문단들이 모여 글이 완성된다. 글을 쓰는 여행자는 언어의 약속된 체계를 이용하여 목적지에 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쓰기는 논리(論理)다. 한자 ‘논(論)’이 말을 의미하는 ‘언(言)’과 길 혹은 바퀴를 의미하는 ‘륜(侖)’이 만난 글자이듯 글쓰기는 질서가 있는 언어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길을 잃게 되면 여행자는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 글이 논리성일 잃게 되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시(詩)와 소설, 수필 등과 같은 문학적인 글 또한 논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해답은 ‘맞다’이다. 신호등이 있는 도로가 아니라 꽃이 피고 눈이 오고 가끔 비가 내리는, 풍경이 있는 논리(論理)다. 논설문이나 비즈니스 글쓰기, 법원의 판결문과 같은 글이 개념과 설명으로 논리를 구성한다면, 문학적인 글은 스토리와 이미지로 연결되고 묘사되는 논리다. 넓은 도로 위인가, 아니면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늙은 소가 걷는 좁은 오솔길인가에 따라 글의 장르가 갈라질 뿐이다.

    얼마 전 나는 뜨거웠던 한 여름의 풍경 위에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달리고 섬과 섬 사이 바다 다리를 건너 전남 신안군 증도라는 작은 섬에 닿았다. 나를 그 먼 곳으로 부른 것은 이 바다에 펼쳐진 소금밭(염전, 鹽田)이었다. 바닷물은 25일 동안 햇빛 아래 말라 소금꽃을 피우고, 꽃잎을 떨구며 응고되면서 소금으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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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전남 신안군 증도_ 태평염전 )


    나는 그 먼 바다로 와서 폭염 아래 익어가는 소금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했다. 동행자는 더운 여름날 그늘 하나 없는 이 곳에 와서 뭘 하느냐며 허탈해 했다. 내가 폭염 아래 소금이 꽃을 피우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소금판매소에 가서 소금을 사고 있었다. 할 일이 없어진 그녀의 채근에 그 원시의 바다를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금밭의 이미지를 담고 돌아 왔으며, 그녀는 소금 포대기를 안고 돌아왔다. 나는 그 이미지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해 글을 쓸 것이고, 그녀는 바다의 눈물, 소금을 질서 있게 배합해 김치를 담글 것이다.

    작가 김훈은 이 소금밭을 두고 ‘시간이 기르는 밭’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글을 썼다.

    “ ... 염전은 갯가의 평야다. 바깥은 바다 쪽으로 펼쳐지고 안쪽은 야산에 기댄 마을에 닿는다. 염전은 폭양에 바래지며 해풍에 쓸리운다. 염전의 생산 방식은 기다림과 졸여짐이다. 염전은 하늘과 태양과 바람과 바다에 모든 생산의 바탕을 내맡긴 채 광활하고 아득하다. 염전은 속수무책의 평야인 것이다.
     염전은 바다를 밀어낸 인공의 들이고, 수산업과 농업의 사이에 까여 있는 완충의 평야다. 염전은 잡거나 기르지 않고, 캐거나 따지 않는다. 염전은 기다리는 들이다. 온 들판에 펼쳐 놓은 바닷물이 마르고 졸여져서, 그 원소의 응어리만으로 고요해질 때까지 염부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린다. (중략) 염전은 산업자원부의 산하에 등록되어 있는 광업이다. 소금은 식량이 아니라 광물질인데 기다림의 결정체인 이 광물질이 모든 식량을 인간이 넘길 수 있고 인간의 친화할 수 있는 먹이로 바꾸어 준다.
      염부들은 기다림의 구조 안으로 물을 끌어와서 펼쳐 놓고, 그 기다림을 바닥을 훑어서 시간의 앙금을 거둔다. 폭양 아래서 염전 바닥을 훑는 염부들의 노동은 모든 일차 산업의 생산노동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원초성의 풍경을 이룬다. 안강망 어선을 몰고 연안 어장으로 나아가는 어부들이나 농기계로 모를 심고 벼를 거두는 농부들과는 달리 염부들은 매우 단순한 생산도구만을 지닌다. 염부는 다만 고무래로 밀고 곰배로 긁고 삽으로 퍼담는다.
     염전 노동의 이 단순성은 소금이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절로 빚어지는 결정체이기 때문일 터인데, 이 노동의 단순성은 소금의 원초성과 닮아 있다. 염부의 노동은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전개되고, 소금은 먹이의 재료를 시간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서 거기에 시간의 맛과 무늬를 새겨 넣는다. ... “

( 김훈 에세이, <<자전거여행2>> 중에서 )


      김훈의 이 수필이 전혀 논리적인 것 같지 않지만, 잘 살펴보면 염전의 특성과 염부들의 노동, 풍광 이미지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갯가’, ‘기다림’, ‘졸여짐’, ‘단순성’ 등의 단어들이 질소 있게 조합되어 문장을 이루고, 이 문장들이 연결되면서 마침내 염전이 왜 ‘시간이 기르는 밭’인지를 명약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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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문재는 그의 네 번째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2005)에서 이 소금밭에 와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염전이 있던 곳/나는 마흔 살/늦가을 평상에 앉아/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지그시 힘을 준다/시린 바람이/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눈부시다/소금창고가 있던 곳/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수은처럼 굴러다닌다/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염전이 있던 곳/나는 마흔 살/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이문재 시, <소금창고> 전문 )

     시(詩)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그 이미지들이 너무나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라도 빼거나 더할 곳이 없다. ‘마흔살’, ‘늦가을’, ‘소금창고’, ‘눈물’ 이런 이이지들이 논리적으로 결합되면서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온다’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글쓰기는 논리다. 특히, 글은 어느 커뮤니케이션 수단보다 더 논리적이어서 미술과 음악에 비해 더 인위적이며 더 질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제약이 심하다. 시인 이문재가 ‘글의 끝을 보고 싶다’고 한탄할 정도로….


* 이 글은 (주)행복한상상 / rws인스티튜트 웹사이트(www.rws.kr)에 게재되었습니다.


 

2009/08/07 09:28 2009/08/0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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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동행(同行)
     - 속도에 관하여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어린 여행자를 만났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 기차를 탄 것이다. 여름 방학이 되어 외가에 간다는 이 어린 여행자는 서울에서 김천까지 세 시간 넘게 혼자 가야 한다. 아무래도 여덟 살 아이가 혼자 가기에는 먼 거리다. 김천역에서 아이를 내려달라고 부탁하던 젊은 엄마의 눈이 슬펐다.

     이 어린 여행자는 책을 읽으며 갈 모양이다. 노란색 문고판 과학상식 책이 아이의 눈앞에 반듯하게 세워졌다. 기차가 출발하고 풍경이 뒤로 물러선다. 가만히 있고 싶지만 기차가 앞으로 나아가니 어쩔 수 없는 듯 풍경은 멈칫거리고 덜컹거린다.

      삶이란, 상상의 공간을 현실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일이고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상상이다. 요람에서 시작한 삶이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방으로, 걷기 시작하면서 집 안으로 영역을 넓힌다. 요람에서 상상하던 공간이었던 방이 현실 공간이 되고, 방에서 상상하던 집 안이 다시 현실 공간이 된다. 이 시기 집 안의 벽은 알 수 없는 낙서로 채워지는 상상의 이차원 공간이다.

     초등학생이 되면 학교와 집 사이의 길 위에 상상이 놓인다. 중학생이 되면 옆 마을로, 고등학생이 되면 더 먼 곳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용기 있는 친구들은 벌써 상상을 현실로 만들며 일탈과 파격의 즐거움을 경험한다. 더 이상 집이나 마을 골목, 옆 마을은 상상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물 너머 물, 산 너머 산, 새로운 상상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자동차, 기차와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상상의 현실화는 가속도를 붙인다. 모두들 그렇게 상상의 공간을 현실적 공간으로 만들면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어서도 더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을 갖기는 마찬가지다. 이 욕망의 근원은, ‘지적 호기심’이라는 멋진 말보다는 ‘따분’해서라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답이다. 오래된 현실 공간은 더 이상 참신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것이다. 상상의 공간, 그 새로운 곳으로 가서 가슴 뛰는 설렘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 현실 공간에 갇힌 어른들의 꿈이다.

     교통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과정이 점점 빨라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아이는 너무 빠르다. 혼자 여행하는 이 어린 여행자는 휴대폰으로 외할머니와 통화하며 몇 시 몇 분 역 앞에 나와 달라고 말하고 있다. 교통 기술의 발달은 통신의 발전과 맞물려 있는 법이다. 나는 아이를 보면서 갑자기 쓸쓸해졌다. 이렇게 빨라져야 하는 것일까? 빨라서 우리는 행복할까? 집에서 골목을 상상하고, 옆 마을을 상상하던 과정이 짧아지고 있는데 상상 속의 공간으로 가는 설렘을 이 아이는 알고 있을까? 상상만 하던 공간이 속살을 드러내고 더 이상 상상하지 못하는 현실적 공간이 되었을 때 나는 행복했던가?

     하이네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중략) 이제 사람들은 세 시간 반 이내에 오를레앙까지, 그리고 같은 시간 내에 루앙까지 여행한다. 이 노선들은 벨기에와 독일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내게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과 숲이 파리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미 독일 보리수의 향내를 맡고 있다. 내 문 앞에는 북해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 볼프강 슈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에서 )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변화가 지니는 두 가지 모순점을 발견하게 된다. 철도는 한편으로 이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열어 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사이의 공간을 없앤다는 것이다. 슈테른베른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의 창을 통해 보이는 전망은 그것이 지닌 심층적인 차원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것은 빙 둘러서 있으며, 어디나 채색된 평면뿐인 하나의 동일한 파노라마 세계가 되어버렸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시각적 인식에 존재하던 초점심도(焦點深度)는 속도로 인해 가까이 놓여 있는 대상들이 사라져 가면서 완전히 상실되었다. 이는 전경(前景)의 종말, 즉 산업화 이전에 여행의 본질적인 경험을 이루던 공간 차원의 종말을 의미한다. 전경을 통하여 여행자는 스스로를 자신이 지나치고 있는 풍광과 연관지었고, 자신을 이 전경의 일부분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를 그 지역의 풍광과 일치시켰고, 여행자는 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 경계 내에 존재했다. 속도로 인해 전경이 해체되면서 여행자는 이러한 공간 차원을 잃게 되었다." ( 볼프강 슈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에서 )


     슈테른베른거의 말처럼 교통수단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아예 ‘사이의 공간’이 없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보로 걷는 여행자에게는 풍경이 또 하나의 공간으로 다가오지만 기차를 탄 여행자에게는 그저 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파노라마일 뿐이다. 비단 풍경만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다. 도로가 생기면서 추풍령 고갯길에 있던 주막들이 사라지고,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28번 국도 주변의 상가들이 문을 닫는다. 대신, 고속도로가 닿아있는 포항의 죽도시장에는 외지인으로 붐비는, 이른바 '공간의 빈부 현상'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있는 공간 또한 보이지 않는 실(失)이 있다. 더 이상 상상하지 못하는 현실 공간으로 남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나는 아직 강원도 춘천 땅에는 발을 들이지 않고 있다. 이외수 소설에 등장하는 무어(霧魚)를 잃기 싫어서다. 무어(霧魚)는 안개 짙은 날이면 안개 속을 헤엄쳐 춘천 호반의 댐과 댐 사이를 넘나든다는 상상 속의 물고기다. 춘천을 상상의 공간으로 남겨 놓았기에 나는 무어(霧魚)에 대한 상상을 잃지 않았으며 누군가에게 '춘천 갔다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

    교통이 빨라지면서 상상의 현실화가 빨라지고 그만큼 아이들의 성장도 빨라졌다. 그러나 빠른 교통수단이 ‘사이의 공간’을 없애듯 아이의 빠른 성장이 마땅히 거쳐야 하는 시기를 건너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더 멀리 더 빨리 갈 수 있어 좋지만 상상의 공간을 잃어버리고 너무 빨리 현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린 여행자가 건네는 웨하스를 먹으며 아이를 부탁하던 젊은 어머니의 슬픈 눈빛을 생각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기차에 오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다는… .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별과 작별의 시간도 빨라지고, 공간이 더 없이 가까와졌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더 멀리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어느새 어린 여행자 앞에는 책이 아니라 과자가 놓여 있다. 맞다. 네가 여행의 정답이다. 여행자에게는 허기를 채워줄 음식이 현실인 것이다. 빠르든 늦든, 기차가 앞으로 내닫든 풍경이 뒤로 도망가든 우리는 교통 기술의 이기(利器)를 이용해야 하는 이 시대의 여행자일 뿐이다.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과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발바닥의 물집,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것이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는 비신체적, 미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 속의 빈터는 사라져 버렸는가?  ..." (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서 )




2009/07/29 14:51 2009/07/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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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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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밝을수록 '그늘'이 짙어진다고 했던가요. '빛'이 기쁨과 희망을, '그늘'이 슬픔과 좌절을 표상하는 것인가요. '빛'이 '그늘'을 만들듯, 기쁨과 희망이 슬픔과 어둠을 만들고 있나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은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길을 가는 '동행'입니다.

      지하 서울역을 걸어 지상으로 내달음치다 고인의 사진을 안고 있는 용산 참사의 유족들을 보았습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은 세상으로 향한 짧은 외침을 플래카드에 붉게 써서 지하 서울역 한 모서리에 서 있습니다. 아니, 서 있다기보다는 광고판처럼 걸려 있습니다. 그 앞으로 전철을 탔던 사람들이 풍경 스치듯, 광고판 앞을 스치듯 지나갑니다. 유족들에게는 표정이 없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것 같습니다. 목례를 했습니다. 내가 이들을 모르듯 이들 또한 나를 모르지만 나의 목례에 목례로 답합니다. 나는 고개만 숙였을 뿐인데 이들은 허리까지 휘청거립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빛(?)'이 '용산 참사'라는 짙은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희망이 좌절을, 기쁨이 슬픔을 잉태하고 있다고 했나요. 그 반대로 좌절이 희망을 만들고 슬픔이 기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했나요.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좌절과 슬픔도 있습니다. 적어도 생명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상한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더 이상 기쁨과 희망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니체는 <정오의 그림자>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타자와 대면하는 방식에 대한 올바르고 진지한 모색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반성적 거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재적인 방식의 삶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빛이 위에 있고 사물이 아래에 있듯, 위에서 내려다 본다면 그늘을 만들기 마련이겠지요. 세상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있으며, 강한 자가 있으며 약한 자가 있어 그늘을 만들어내야 한다면, 정오 때처럼 그림자를 가장 작게 드리우는 것이 좋습니다. 슬픕니다. 왜 정오를 기다리지 못했나요? 기쁨이 슬픔을, 희망이 좌절을 잉태하는 이 지독한 패러독스가 너무 슬픕니다.


2009/02/07 18:00 2009/02/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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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에’와 ‘시니피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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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글쓰기에 ‘논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심지어 최근에는 ‘창의’라는 말을 붙여 ‘창의적 논술’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본질을 놓고 본다면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글쓰기는 모두 ‘논리적’이다. 언어(言語)라는 것이 원래 논리적으로 결합된 기호 체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어라는 약속된 기호 체계로 세상을 이해한다. 네모나고 다리가 네 개인 물체를 보면 우리의 뇌는 그 사물(시니피에, Signifie, 표의)을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학습되어온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을 ‘책상’(시니피앙, Signifiant, 표기)이라고 기억하고 전달한다. 그래서 사람은 학습된 언어 체계로 같은 세상을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인체는 구조학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닭 우는 소리를 ‘꼬끼오’라고 인식할 때 미국 사람들은 ‘커커두들두’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본다면 언어라는 기호가 뜻하는 원래 세상 속의 사물을 ‘시니피에(Signifie, 표의)’라 하고, ‘책상’이나 ‘꼬끼오’라고 표기되는 것을 ‘시니피앙(Signifiant, 표기)’이라고 이야기한다. 글쓰기라는 것은, 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모두 ‘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언어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지성(知性)에 의지하지 않고 감정(感情)에 의지한다. 감정적인 말로 꼬투리를 잡거나 화를 돋우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이 감정해 의지해 욕설이나 실언을 해도 문제가 법인데 사회가 감정에 의지하게 되면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감정에 휩싸여 쓰는 인터넷 댓글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일이다. 바르게 글을 읽고 바르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될 때 혼란을 부추기는 사회가 아니라 창의적이고 안정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책 읽는 사람들>(강남구립도서관, 2008년. 10월호)에 실렸습니다.


 

2008/10/12 19:14 2008/10/1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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