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view ]


 

정이현이 생략한 ‘마지막 문장’

- 정이현 장편소설 <<너는 모른다>>(문학동네, 2010) -


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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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촉망받는 젊은 소설가 정이현이 <<달콤한 나의 도시>>(2006)에 이어 2009년 장편소설 <<너는 모른다>>를 발간했다. 작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작가는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고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이전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 어느 일요일 아침 한강에 남자 시체가 한 구가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라가고 있지만 추리소설다운 서스펜스(suspense)와 스릴(thrill)이 없고 이전 작품에서 보이던 감수성도 드러내지 못했다. 추리소설 형식이라는 이유이겠지만 문장이 밋밋하고 이전 단편소설에서 보이던 탄탄한 구성력도 사라져 헐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주목받는 것은 가족 이야기를 통하여 현대사회 인간관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소설 속 가족 구성원은 가장 김상호, 화교인 새 어머니 진옥영과 그들의 딸 김유지, 그리고 김상호가 진옥영과 재혼하기 전 부인 미숙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김은성과 아들 김혜성이다. 조용하게만 보이는 이 가족은 소설의 제목처럼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가족들은 얼굴을 마주할 뿐 이야기하지 않으며, 서로 피하지는 않지만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말썽은커녕 걱정스러울 만한 일을 일으켜본 적이 없는 유지의 ‘실종’으로 서로를 ‘알’게 된다.

    장기 밀매라는 불법적인 일로 가정을 꾸려가는 아버지와 ‘유지’를 임신했기 때문에 결혼했지만 주기적으로 예전의 사랑을 찾아 떠나는 새 어머니 진옥영, 이런 가족이 싫어 따로 살면서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딸 김은성과 무심한 척 가족의 일원이 되어 살지만 ‘묻지마’ 방화를 일삼는 아들 김혜성,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늘 외로워하지만 표현하지 않는 김유지…. 이들의 가족 관계는 단적으로 말해 불구(不具)다.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불구’라는 말 그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만 가족이라 규정할 수 있는 ‘사랑’과 ‘화목’, 그리고 ‘연대감’이 없다.

    소설가 정이현은 작가적인 감각으로 가족이란 이 불구의 관계망을 드러냄으로써 구부러지고 일그러진, 심지어 깨져버린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망을 캐치(catch)하고 풀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드러내서 어쩌라고? 정작 정이현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작가 정이현은 이 시대 불구의 증후를 찾아냈지만 그 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거나 혹은 밝히지 못했다. 아버지 김상호를 재판정으로 보내고, 딸 김혜성이 자주 방배동 집에 들러 유지를 돌본다는 것으로, 새엄마 진옥영이 씩씩해졌다는 김혜성의 독백으로 소설을 따뜻하게 끝냈지만, 정작 중요한 ‘이들이 왜 이런 불구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독자에게로 밀쳤다. 그래서 ‘내가 지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수직 비행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거나,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보태지 않고 과감히 끝을 맺는 것’이라는 쉼보르스카 여사의 말을 인용하여 작가의 말을 쓴 것일까. 대체 정이현이 5백여 페이지 분량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하고도 생략해 버렸던 ‘마지막 문장’은 뭘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진부한 아포리즘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킬로만자로의 표범’같처럼 혼자 살기는 힘들다. 그래서 자본주의라는 가혹한 법칙이 작동하는 밀림 속에서도, 사람들의 관계마저 거래되는 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관계망의 기초인 ‘가족’이란 테제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흔히 ‘가족의 화목과 행복’을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이야기하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도리어 이 말은 곧 욕망의 집어등처럼 명멸하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건강한 가족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증후는 이미 있었다. 19세기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팽창이 사적인 연대를 손상시키며 가정을 파괴하고 있다고 이야기했고, 현대 사회학자나 철학자들은 서양 근대화시기에는 가정이 자본주의를 확립하는 수단이었으며 현대는 자본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생산과 소비의 최소 단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최근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 <<친밀성의 거래(The Purchase of Intimacy)>>(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009)의 저자 ‘비비아나 A. 젤라이저’는 친밀성이라는 테제로 사회사를 돌아보고 친밀성(가족)과 거래(시장)의 영역이 그렇게 명확히 분리된 것도 대립적인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친밀성과 거래는 구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로 교차되고 연관되면서 삶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매춘이라는 친밀성의 거래는 어느 시대나 있어 왔으며, 룸살롱, 대딸방, 키스방, 아빠방 등 최근 새로운 친밀성 거래 방식이 생겨나는 것은 거래의 영역과 친밀성의 영역이 분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속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다. 가족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관계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젤라이저’식으로 바라본다면, 가족이란 관계 또한 친밀성을 거래하는 하나의 시장이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해 가문과 가문이 혼맥을 맺어왔으며 최근에는 ‘재벌가계도’란 이름으로 재벌들간의 주고받기식 혼맥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가족의 일원이 친밀성을 거래하면서 얻는 대가는 ‘보호와 보장’ 그리고 ‘기호’다. 소설에서 아버지 김상호가 얻고 싶은 것은 가정이라는 기호(sign)다.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김상호에게 가정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게 해주는 단초(斷礎, 깨어져서 조각이 난 주춧돌)로 작동하고, 온전한 가정을 꾸려가는 성실한 사람임을 표시하는 ‘기호’다. 임신을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배반하고 김상호와 결혼한 진옥영이 얻고 싶은 것은 한국 국적 취득과 안정된 생활이며, 딸 김은성과 김혜성이 얻고 싶은 것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지원(돈)’이며,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 유지가 바이올린에 몰두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사랑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그것을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이외의 것은 개별적인 것인 것으로 간주하고 서로 묵인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처럼 ‘너를 모른다’.

    작가 정이현은 ‘사랑과 결혼은 다른 것이다’를 외치며 경제적 능력과 경제적 조건을 찾아 이합집산하는 우리, ‘꽃’ 대신 ‘보석’이나 ‘자동차’를 을 외치는 이 시대의 사랑법과 그 사랑법이 낳은 불구의 관계, 거래라는 시장 영역이 전혀 시장적이지 않을 것 같은 가족이라는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마지막 문장에 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이현은 그 마지막 문장을 생략하면서 이 가족을 묵인했다. 사실을 직시한다는 것이 불편했을 것이다. 불편하지만, 거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주부나 고객의 화대로 생활을 유지하는 매춘 여성이나 다르지 않다. 고객을 웃음과 미소로 대해야 하는 직종군의 일을 두고 최근 ‘감정 노동’이란 말이 생겨났으니 이 웃음과 미소 또한 친밀성의 거래이며, 상대가 기분 좋으라고 남발하는 ‘칭찬’이나 ‘Yes’도 개념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가. 우리도 정이현이 그려내고 있는 이 불구의 가족을 용인(容認)한다. 휘어지고 비틀려 있지만 이해하고 묵인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안에서 우리도 모두 공범이기 때문이다.




 

2010/07/05 18:21 2010/07/0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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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남한산성






    ... 아마데우가 막 잠이 들었을 때, 아드리나아의 귀에 한낮의 고요함을 찢는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옆집 대문 앞의 계단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를 에워싸고 서서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요란하게 손짓을 했다.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 신발 끝으로 쓰려져 있는 남자를 걷어차는 것 같았다. 키가 큰 남자 둘이 사람들을 밀치고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병원 입구까지 들고 왔다. 그제야 남자를 알아본 아드리아나는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전단에서 본 멩지스였다. 사진 아래 ‘리스본의 인간 백정’이라고 적혀 있던 사람. (중략)

     오빠는 돌처럼 굳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멩지스를 내려다봤어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창백했던 그의 얼굴을요. (중략) 털이 난 가슴에 먼저 귀를 대고 들은 다음, 내가 건네준 청진기를 가져다 댔어요. ‘강심제!’ 오빠는 이 한 마디만 했어요. 꽉 눌린 그 목소리에는 억누르는 증오가 번쩍이는 칼날처럼 묻어났어요. 내가 주사기에 약을 넣을 동안 오빠가 심장마사지를 했는데,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주사기를 건네줄 때 우리 시선이 아주 잠깐 마주쳤어요. 그 순간 오빠가 얼마나 안터까웠던지! 그때 오빠는 냉철하고도 완고한 의지로 진찰대에 누워 있는 이 살찐 땀투성이 남자, 사람들이 모두 고문과 살인과 국민에 대한 잔인한 억압의 책임자라고 짐작하는 그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싶은 욕망과 싸우고 있었어요. 그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죠.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운! 몇 초 동안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충분했으니까요! (중략)

     갑자기 ‘배신자! 배신자!’라고 외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사람들은 들것에 실린 멩지스가 살아 있다는 걸 보고, 마땅히 죽었어야 할 그를 살린 사람을 정당한 심판을 져버린 배신자로 생각하고 분노를 이쪽으로 돌린 거예요. (중략) 오바가 문을 열자 고함 소리가 사라졌어요.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가운 주머니에 넣은 채 한참 동안 서 있었어요. 사람들은 오빠가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하길 기다렸지요. (중략)

    ‘난 의사요.’ 오빠는 이렇게 말하고, 맹세라도 하듯 다시 한 번 말했어요. ‘난 의사라고요.’ 난 근처에 살면서 우리 병원에 다니는 환자 서너 명을 알아봤어요. 이 사람들은 당황하여 땅바닥을 내려다봤어요. ‘그자는 살인자요!’ 누군가 외쳤고, 다른 사람들도 ‘인간백정!’이라고 소리쳤어요. 오빠의 어깨가 힘겹게 숨을 쉬느라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그는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인간이에요.’ 오빠는 크고 또렷하게 말했어요. (중략)

    그러자 누군가 바로 토마토를 던졌어요. 그 토마토는 오빠의 흰 가운에서 터졌어요. 9중략) 어떤 여자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오빠 앞에 서더니 얼굴에 침을 뱉었어요. (중략) 그 여자는 마치 몸에서 영혼을 뱉어내듯이 여러 번 계속해서 침을 뱉었어요. 더러운 침은 오빠의 얼굴을 적시고 아래로 서서히 흘러내렸어요. (중략)

    ...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이 이네스 살루마롱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면, 난 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나 너에게 요구한 건 살인이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 ‘법적이나 도덕적인 의미에서 그건 범죄가 아니었어. 그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더라도 너에게 판결을 내릴 판사도 없었고,’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말할 사람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명료하고 간단한 일이었어. 우리에게 불행과 고문과 죽음을 불러온 사람의 목숨, 우리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이제 드디어 없애려고 하던 목숨을
그렇게 온힘을 다해, 그가 앞으로도 계속 유혈 체제를 유지하도록 붙잡지는 않는 거였다..‘

    난 무슨 말로 나를 변호했을까? ‘어떤 사람이든, 무슨 짓을 저질렀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할 권리가 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의 생사 여부를 판단하거나 주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쏘지 않는가?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멩지스를 눈앞에서 본다면 필요한 경우 살인을 해서라도 그의 살인을 막자 않을까? 당신이 했어야 할 일,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것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지 않은가?

    멩지스가 눈앞에 누웠을 때, 프라두가 본 것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특정한 개인이었다. 오직 그라는 개별적인 한 인간. 프라두는 멩지스의 삶을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과 연관지어, 더 큰 범위 속의 한 요소로 계산할 수 없었다. 프라두의 혼잣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바로 이 점을 비난했다. 그가 개별적인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도 관련된,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목숨과 관련된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 한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여러 사람의 개별적인 목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 ...
 

-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 열차1>>(들녘, 2007) 중에서


Vs




     ... 김상헌은 혼자서 떠났다. 그의 행장은 가벼웠다. 책과 벼루를 버리고, 미숫가루 다섯 되와 말린 호박오가리 열 근을 챙겼다. 말을 배불리 먹이고, 두꺼운 솜옷에 털모자를 쓰고 환도를 허리에 찼다. 김상헌은 삼각산을 서쪽으로 돌아서 송파나루로 향했다. 송파에 이미 적이 들어와 있으면 더 상류로 올라가 와부에서 강을 건널 작심이었다.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아침 햇살이 깊이 닿아서 먼 상류 쪽 봉우리들이 깨어났고, 골짜기들은 어슴프레 열렸다. 그 사이로 강물은 얼어붙어 있었다. 언 강 위에 눈이 내리고 쌓인 눈 위에 바람이 불어서 얼음 위에 시간의 무늬가 찍혀 있었다. (중략)

    강이 얼어서 나룻배 두어 척은 강가에 묶여 있었다. 청병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청병이 다가온다는 소문에 나루터 마을은 흩어졌다. 남대문에서 방향을 돌린 어가행렬이 물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이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널 것이고, 청병은 임금의 뒤를 쫓아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주인 없는 개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김상헌을 향해 짖다가 달아났다. 빈 마을에 늙은 사공이 한 명 남아 있었다. 김상헌은 사공의 초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사공의 어린 딸이 끓는 물에 미숫가루를 풀어서 내왔다. (중략)

    - 강을 건너시렵니까?
    - 그렇다. 어젯밤에 어가행렬이 여기서 강을 건넜느냐?
    -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람과 말이 모두 걸어서 건넜습니다. (중략)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에…….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중략)
    - 내 말을 주마. 오늘 나를 건네다오. (중략)
    - 말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 순한 말이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 가져라. (중략)
    - 고마우신 말씀이나, 천한 사공이 배를 타지 어찌 말을 타리까. 더구나 눈이 쌓여 말먹이 풀을 구할 길이 없으니…….

    사공이 김상헌의 발 아래 엎드려 가죽신에 새끼로 감발을 쳐주었다. 김상헌은 사공을 앞세우고 얼음 위로 나섰다. 겨울강은 물이 낮아서 물가 쪽으로 바위가 드러났다. 낮 동안 햇볕을 피해 구불구불 얼음 위를 건너갔다. 마주 보이던 나루터 마을도 비어 있었다. 돌무더기로 쌓은 선착장에서 부서진 배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김상헌은 선착장으로 올라섰다.

    - 나는 남한산성으로 간다. 나를 따르겠느냐?
    - 아니오. 빈집에 어린 딸이 있으니……. 소인은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소이다.
    - 그럼 가거라. 고맙다.
    - 산성까지 여기서 한참이오. 서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길이 가팔라도 서문이 가깝소. (중략)

    김상헌은 사공의 목덜미며 몸매를 찬찬이 살폈다. 야위고 가는 목에 힘줄과 핏줄들이 얼기설기 드러나 있었다. 힘줄은 힘들어 보였다. 밤새 강물이 굳게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가 없이도 강을 건널 것이고,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다. 십만이라든가 십오만이라든가, 대병이 모두 강을 건너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것이고, 그 사나흘 동안 강물은 얼고 또 녹을 것이다.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에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다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 사공의 피가 김상헌의 얼굴에 튀었고, 눈물이 흘러내려 피에 섞였다. 김상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버려진 말이 길게 울었다. ...

- 김훈 소설 <<남한산성>>(학고재, 2007)




 

2010/06/28 10:29 2010/06/2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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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okina 80-200mm / 동대문시장


 



    ... 부르디외는 벤야민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로 설명하지 않은 점입니다. 물론 부르디외도 경제적 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중층결정’의 의미에서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capital cultured)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capital scolaire)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capital de relation social)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라고 하더라도, 돈만으로 이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곧 상류사회의 성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전시회에 다니고 미술품을 수집할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늦게나마 대학이나 대학원에 등록하여 명목분인 학위를 딸 수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 새로운 인맥도 넓혀 나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그들이 곧바로 상류사회로부터 공인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상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그들에게는 막강한 경제적 자본이 있습니다. 그래서 벼락부자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세 가지 자본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에 온힘을 쏟고 나아가 가장 수준 높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을 보내지요.

    한국 사회의 경우 1970~1980년대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고도성장 그리고 강남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투기의 열품은 벼락부자를 많이 양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갑자기 상류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했겠지요. (중략)

    그렇다면 하루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은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vanity)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허영이라는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취향은 사회공간을 차지하는 개인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해준다. 그래서 취향은 사회적 방향감각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사회 공간 내에 주어진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을, 그들의 재산에 알맞은 지위나 그 지위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 또한 사회 공간 내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배치될 경우, 그리고 또 그 상품과 제 집단들 간의 대응관계에 대해 다른 행위자들이 가진 실천적 지식이 주어졌을 경우, 사람들의 취향은 선택된 실천과 대상에 대한 사회적 의미 그리고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실천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해준다. (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1979 )

    부르디외는 미적 취향이 계급적 아비투스의 전형적 사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적 취향이 그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입니다.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중류나 하루계급 사람들도 흔히 하는 골프와 같은 운동이 한때 무엇을 의미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상류계급 사람들이 운동이라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서 골프를 선호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하류계급 사람들이 하기 힘든 운동이었기 때문에 골프를 선호했을 뿐입니다.

    상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품 핸드백을 상류계급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그 핸드백이 튼튼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루계급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특성이 그들이 고가의 핸드백을 구매하는 주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비싼 가격일 때 혹은 세일을 전혀 하지 않는 물건이 오히려 더 잘 팔리는 역설적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는 것입니다. (중략)

    2007년 1월 12일 미국 워싱턴 랑팡 플라자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웃어넘기기 힘든 사진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죠슈아 벨(Joshua Bell, 1967~ )이 거리의 악사가 되어 남루한 차림으로 45분간 아름다운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비록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350만 달러를 호가하는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었지요.

    클래식 음악이 그 자체로 향유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조슈아 벨 주변에는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멈추어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은 달랑 7명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구걸함에 동전 한 닢이라도 던져 넣어준 사람은 27명에 불과했고 모금된 돈도 2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미적 취향이 얼마나 강하게 사회적 함의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조슈아 벨의 연주가 아무리 훌륭한들, 값비싼 연주회장, 매스컴의 주목, 저명인사들로 이루어진 환호로 이루어진 아우라가 걷히면 그 가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인 셈이죠.

   죠쥬아 벨의 여주를 들으러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고가의 입장료를 치르고 연주회장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가 고급 문화생활을 즐기는 상류계급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연말에 트로트 쇼에 가는 사람을 보면, 중하류계급에 속할 거라고 간주하지요. 물론 이 판단은 부르디외의 말대로 우리에게 이미 ‘상품과 제 집단들 간의 대응관계에 대해 다른 행위자들이 갖는 실천적 지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이런 실천적 지식, 즉 취향을 가지고 있기에 타인들이 문화적으로 선호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어렵지 않게 예측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은 중하류계급 사람들이 목돈이 생겼을 때 조슈아 벨의 클래식 공연장에 가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스스로 상류계급 문화를 연출함으로써 상류계급에 편입되고 싶다는 자신의 은근한 소망을 드러내는 셈이라고 할까요.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7 23:51 2010/06/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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