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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광덕산





    ... 나 자신 혹은 나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이나 원인을 위해서 희생되어도 좋은 상품, 도구 , 혹은 기호로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스스로를 더 고상하고 훌륭한 다른 목적들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할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하나의 고유한 선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생산력의 증가, 다시 말해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일종의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산업자본이 설치해 놓은 집어등에 사로 잡혀 스스로 교환 가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며 체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마치 선사(禪師)가 사자후를 토하듯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세계는 교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것은 ‘아무 데서도 (교환을 위한) 등가물을 갖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중략)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을 위해 이유, 원인, 목적성을 발견하는 것은 교환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장미 한 다발을 와인 한 병과 바꾸는 것이 바로 교환이지요. 그런데 교환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장미와 와인에 교환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환을 하면, 장미가 가진 고유성과 와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하지 않는다면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무엇이든 서로 교환되려면 그것이 가진 생생한 질들을 모두 추상해야 합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돈’입니다. 장미는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고, 와인도 1만 5000원의 가치가 있으므로 서로 바꿔도 된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만약 교환만을 염두해 둔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오직 교환 가치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눈앞에 아름다운 진달래가 피었다고 했을 때 지금 보는 진달래는 사실 교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작년에 피었던 진달래가 아니고, 혹은 내년에 피어날 진달래도 아닙니다. 더구나 진달래를 꺾어다가 다른 종류의 책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진달래의 고유성과 책의 고유성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진달래 역시 교환 가능한 사물의 일종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진달래가 피어난 이유, 원인, 혹은 목적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진달래는 계절의 변화와 씨앗이라는 조건 때문에 피었을 것이고, 이 꽃이 핀 목적은 자신의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생물학적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진달래는 존재를 몇 가지 환경 조건과 생물학적 이유들로 환원해버리면, 눈앞에는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어떤 분석의 대상 하나가 놓입니다. 이 상황에서 진달래의 아름다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꽆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겠지요.

    교환의 논리가 작동하려면 우선 인간의 추상적 사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추상적 사유는 결국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의교환 논리에 대한 비판은 아도르노가 수행했던 이성 비판의 전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위치에 비추어 보면 철학은 전통에 따라서 무관심을 표명한 것에, 즉 비개년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둔다. 말하자면 플라톤 이래 덧없고 사소한 것이라고 배척당하고 헤겔이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꼬리표 붙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우발적인 것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양으로 격하된 질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으로 된다. (테어도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1966)


    아도르노는 미래의 철학이 맡아야 할 임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앞으로 도래한 철학은 ‘이성’이나 ‘개념’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 그리고 ‘비개념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철학이, 이성이나 개념에 포착되지 않는 것들을 억압하거나 배제해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프랑스의 해체론적 경향의 흐름을 선취한 인물이었습니다. 데리다(Jacques Derida, 1930~2004)나 들뢰즈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도 이성이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통 사유를 철저히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도르노가 꿈꾼 철학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철학을 앞으로 세대가 공유한다면, 모든 것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유해온 자본주의 논리도 어느 정도 해소될 지 모릅니다. ‘말할 수 없는 것’,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이 배제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다루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추상적 교환 논리는 사유나 이성을 통해서 고유성을 가진 사물들을 추상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가진 감성의 구체성을 부정하고 이성의 추상성을 긍정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성의 추상성이 구체적 감성으로 포착되는 사물과 사건들의 생생함과 다양함을 부정한다면, 결국 추상적 교환 논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미적 감수성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7 22:53 2010/06/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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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Canon EF 50mm / Computer Aid






     ... 베버는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원인을 생산과정에서 청교도적인 소명 의식과 금욕적 태도에서 찾았습니다. 자신의 계급 혹은 직업에 대해 종교적 소명 의식이 있던 자본가나 노동자들이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산과정에서의 원가절감이나 비용절감, 혹은 노동 현장에서의 근면성 등은 그것이 없을 때보다는 있을 때 산업자본에 더 많은 잉여가치를 약속해 줍니다. 이 점에서 베버 역시 생산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사유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좀바르트나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의 잉여가치가 오직 유통과정에서만, 다시 말해 한때 노동자였던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베버와 달리 이들 후자의 개념은 소비중심주의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생산중심주의를 비판했던 이유도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자본주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르면 돈을 가진 자가 상품을 가진 자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그래서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우월한 자리를 점유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소비자의 위치일 때입니다. 노동의 대가든 다른 경로든 간에 돈이 있다면, 소비자는 상품을 파는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론적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상품을 살 수도 있고 사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산업자본은 반드시 자신이 만든 상품을 노동자인 소비자들이 사게 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의 유혹과 인간의 원초적 허영 사이의 은밀한 야합을 목도합니다. (중략)

     소비 영역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 나아가 소비자의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전략이 관철되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소비 영역에서 전개되는 이 같은 산업자본의 음모와 전략을 폭로하는 것. 이것이 보드리야르의 평생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네 가지 차원의 논리를 해명합니다. (중략)


     “기호와 차이의 논리라고 할 수 있는 소비의 논리를, 그 논리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논리로부터 구별해낼 필요가 있다. 네 가지 논리가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①사용가치(use value)라는 기능적 논리, ②교환가치(exchange value), ③상징적 교환(symbolic exchange)의 논리, ④가치(value)/기호(sign)의 논리. 첫 번째는 실제적인 작용의 논리이다. 두 번째는 등가(equivalence)의 논리이다. 세 번째는 예매성(ambivalence)의 논리이다. 네 번째는 차이의 논리이다. 또한 유용성의 논리, 거래의 논리, 증여의 논리, 신분의 논리.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상품’, ‘상징’, ‘기호’의 지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것만이 소비라는 특수한 영역을 규정짓는다.” (장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1973)


     (중략) 간단한 예를 들어 살펴보면 보드리야르가 제안한 사물의 네 가지 서로 다른 논리가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될 것입니다. 여기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도구’일 수도 있고, ‘상품’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기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도구’의 측면에서 바라본 다이아몬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가장 견고한 광물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 도구로서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라는 기능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두 번째로 다이아몬드를 ‘상품’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다이아몬드는 1억 원으로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때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예들 들어 다이아몬드 한 개는 자동차 5대나 컴퓨터 100대와 바꿀 수 있습니다. (중략)

    세 번째로 다이아몬드는 ‘상징’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는 사랑하는 딸의 결혼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1억 원으로 다른 것을 살 수도 있겠지요. 혹은 1억원 상당의 다른 상품과 다이아몬드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물로서의 교환은 앞서 말한 등가교환과는 다릅니다. 내가 자이아몬드 하나를 선물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대방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교환’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선물로서의 다이아몬드는 ‘애매성의 논리’니 ‘증여의 논리’를 따른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애매성으로 번역된 ‘ambivalence'라는 단어는 가치가 애매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는 ‘기호’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네 번째 측면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상류계층에 속하므로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이아몬드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듯이 ‘신분의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중략)


                    --------------------------------------------------------------------------  
                                        도구                    상품                 상징                  기호
                    --------------------------------------------------------------------------
                    가치             사용가치              교환가치            상징가치            기호가치
                    작동논리       작용성                 등가성               애매성               차이성
                    적용영역       유용성의 차원       거래의 차원        증여의 차원        신분의 차원
                    --------------------------------------------------------------------------



    생산중심주의에서 살펴본다면, 사물의 네 가지 측면들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생산에 가장 도움이 될까요? 인간의 노동력을 줄여주거나 아니면 확장시켜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첫 번째 ‘도구’로서의 사물이란 개념은 생산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또 ‘상품’으로서의 사물도 당연히 생산에 도움이 됩니다. 높은 교환가치에 상품이 팔리면, 그만큼 산업자본은 생산력을 좀 더 확장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기호’로서의 사물도 생산중심주의에 잘 부합됩니다. 인간이 가진 허영심과 욕망을 증폭시켜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품이라도 고가에 사들이게 한다면, 산업자본은 막대한 잉여가치를 남길 수 있겠지요. (중략)

     사실 ‘도구’, ‘상품’, ‘기호’라는 사물이 가진 생산주의적 측면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동기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사물들의 측면입니다. 하지만 ‘상징’으로서 타인에게 주는 선물, 혹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주는 사람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정신과 생활의 만족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도구’, ‘상품’, 그리고 ‘기호’로서의 사물의 측면들은 인간을 무한경쟁의 각축장으로 내몰지만, 사물의 ‘상징’적 측면은 공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주의적 만남의 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리는 타자와 관계할 때 무엇인가를 주거나 혹은 받습니다. 그것은 말의 형식일 수도 있고, 미소와 같은 육체적 기호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장미꽃과 같은 어떤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자에게 혹은 타자가 우리에게 건네준 사물은 선물 아니면 뇌물의 형태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보드리야르가 강조했듯이 뇌물은 그것을 받은 사람에게 사용가치나 교환가치, 혹은 기호가치로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선물에는 사용가치, 교환가치 그리고 기호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사랑이나 애정의 표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가치, 즉 ‘상징적 가치’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예전에 필자가 강의실에서 만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늘 호두 두 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꺼내 만지작거렸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첫사랑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고 하더군요. 가령 호두의 사용가치는 망치로 깨서 호두를 먹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호두를 먹지 않고 그냥 가지고 다녔습니다. 물론 호두의 교환가치 역시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겠지요. 그녀 또한 호두를 다른 것과 바꾸려고 생각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그 호두의 기호가치는 어떨까요? 호두를 가졌다고 해서 그녀의 사회적 신분이 높아질 리 만무하지요. 그녀에게 호두는 첫사랑으로부터 받은 완전한 의미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5 16:30 2010/06/2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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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동대문시장






     ... 좀바르트는 사치야말로 산업자본주의 발전의 핵심동력이라고 보았습니다. 보드리야르도 소비야말로 생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나치게 지속적으로 영위한다면, 우리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소비생활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남길 수 없을 겁니다.(중략)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남기는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다. 여기서 M'는 M+△M이다. 다시 말하면 M'는 최초에 투입된 화폐액에 어떤 증가분을 더한 것과 같다.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초에 투입된 가치는 유통 과정에서 단지 자신을 본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변화시켜 잉여가치를 첨가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가치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야말로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해주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1867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운동을 M-C-M'이란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M은 화폐(money)를, C는 상품(commodity)를, 그리고 △M을 유통을 통해 얻은 이윤, 즉 잉여가치(surplus value)를 상징하는 기호입니다. (중략) 이 공식을 유통과 생산과정 두 두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M-C-M'은 M-C ...... C'-M'라는 두 단계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때 M-C는 생산과정을, 그리고 C'-M'는 유통과정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핸드폰을 만들어 잉여가치를 남기는 회사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회사의 자본가는 처음에 일정한 자본금(M)이 있습니다. 그는 이 돈으로 핸드폰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재료들, 즉 노동자와 원료, 부품(C)를 구입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핸드폰(C')을 공장에서 상품으로 만들어냅니다. 물론 이 단계까지는 자본가의 의도대로 진행됩니다. 돈을 가진 것은 바로 자본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단계부터입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팔아 돈을 회수하는 과정은 자본가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닙니다. 자본가는 엄청난 양의 핸드폰이란 상품이 있지만, 이때 돈을 가진 것은 소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돈을 가진 사람이 월등히 우월하다는 자본주의 원리는 생산과정이나 유통과정에서도 그대로 관철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핸드폰을 만들어낸 자본가의 고뇌는 사실 단순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품을 팔아서 소비자의 지갑 속에 있는 돈을 내 수중에 넣을 수 있을까?” 이 고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비자들은 이미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본가는 소비자들이 이전에 구입한 핸드폰을 버리고 새로운 핸드폰을 다시 사도록 유혹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과제를 완수해낼 수 없다면 자본가에게는 치명적 결과가 초래될 것이 뻔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소비자를 유혹하는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바로 기호가치와 관련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새로 생산해낸 핸드폰에 가장 소망스러운 기호들을 각인시켜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각종 대중매체와 대중 스타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전략으로 현실화되겠지요. 이제 핸드폰에 새겨 넣는 새로운 기호들은 이 핸드폰을 구매한 소비자들이 사랑받고 주목받는다는 이미지로 수렴됩니다. 만약 이러한 유혹이 성공한다면, 산업자본은 수많은 핸드폰을 팔고 원하던 잉여가치를 남기겠지요. 핸드폰만 성공적으로 팔린다면 막대한 광고료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소비자가 구매한 핸드폰 가격에 이미 예상 광고료를 포함했을 테니 말입니다.

    자본가가 생산한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결코 잉여가치를 남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입니다. 보르디야르가 생산이 아닌 소비의 논리에 집중했던 이유도 여기 있지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잉여가치를 남길 수 있는 지점이 유통과정, 즉 ‘상품-화폐(C'-M')의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까요?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상품을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가치를 강조할 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중략)

     사실 과거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는 행복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공장에서 만든 상품들을 글자 그대로 항상 새로운 제품이었지요. 예를 들어 영국의 값싸고 질 좋은 섬유제품이 생산되자마자 영국 사람들에게 바로 소비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가지 않아 영국에서는 팔리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여러 섬유제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마침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산업자본은 아직 산업자본주의를 모르던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요. 이것은 산업자본의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식민지는 노동력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노동시장이며 동시에 소비시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식민지 지배를 통한 엄청난 잉여가치의 획득으로 팽창한 산업자본주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걸림돌을 만납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된 식민지 쟁탈전에 독일과 일본 등 후발 산업자본주의 국가가 덩달아 뛰어든 것입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1914~1919)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산업자본주의에 외적 팽창의 길 역시 제동이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산업자본은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을까요? 자국의 소비자들에게 다시 눈을 돌린 것도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자국의 소비자들이 이미 구매한 상품을 폐기하고 새로운 상품을 계속 구매한다면, 구태여 산업자본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지출, 향유, 무계산적인 구매“의 시대가 열린 진정한 이유입니다.(중략)

     산업자본은 욕망과 개성의 실현을 찬양하는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 허영심을 집요하게 자극할 수 있는 다양한 기법들을 대중매체의 발달과 함께 고안해 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사는 것은 지금, 지불은 자중에”라는 슬로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신용카드의 사용과 폭발적 소비 증가 사이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중략)

     보드리야르는 소비자가 다름 아닌 노동자라는 엄연한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소비사회의 화려한 유혹에 물든 대부분의 소비자는 환각의 세계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불행하게도 돈의 고갈, 혹은 빚의 확대일 뿐입니다. 다시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빚을 갚기 위해서 그들은 노동자의 지위로 산업자본에 편입되어야 합니다. 이 상황이 되풀이될수록 그들은 자본가에게 예속되겠지요.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생산과 소비는 생산력과 그 통제의 확대 재생산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똑같은 거대한 과정”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중략)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욕망조차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포획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략)

     산업자본주의에서 자유란 분명 소비의 자유입니다. 돈이 부족하거나 아예 돈이 없을 경우 우리가 느끼는 부자유의 느낌, 심지어는 심각한 우울증을 느끼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줄 수 있다고 믿는 상품들을 구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습니다. 우울할 때마다 백화점에 들려 쇼핑을 하는 여성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3 01:58 2010/06/23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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