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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안양예술공원






    ... 객관적 기능의 영역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다른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를 표시하는 요소(signifying elements)’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symbol)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요구와 더 이상 관련되어 있지 않다. 바로 그 이유는 사물이 전혀 다른 것(그것은 사회적 논리일 수도 있고 욕망(desire)의 논리일 수도 있는데)에 대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무의식적이고 유동적인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와 사회>>. 1970 )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자본주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절대왕조와 함께 발전했던 상업자본의 황금기가 있었지요. 17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대항해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 말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힘이 상업자본주의 시대의 막을 고하게 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합니다. 가령 동해에 위치한 강릉에서는 오징어 가격이 서울보다 쌉니다. 만약 강릉에서 오징어 가격이 1000원이라면, 서울에서는 오징어가 가격 2000원에 팔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인은 강릉에서 오징어를 1000원에 사서, 서울에서는 2000원에 팝니다. 결국 그에게는 1000원의 이윤이 남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 곳,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 떠나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 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략)

     반면 상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존에 구입한 제품과 새로운 제품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공간의 차이처럼 시간의 차이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새로운 유행을 만드는 산업자본의 행위 자체가 시간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유행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유행이란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 것이지요.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산업자본은 대중매체를 이용해 텔레비전 광고와 같은 직접 광고나 드라마 및 영화와 같은 간접광고를 통해 자신이 만든 상품을 하나의 유행으로, 다시 말해 가장 모던한 제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대중매체는 대가로 제공되는 산업자본의 광고료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결국 산업자본과 대중매체는 완전한 공생관계를 형성한 셈입니다. (중략)

     왜 신문사나 잡지사는 구독률에 목을 맬까요? 왜 공중파 방송사나 유선 방송사는 시청률에 관심을 집중할까요? 왜 인터넷 사이트는 조회 수에 신경을 쓸까요? 구독률, 시청률, 그리고 조회가 높을수록 대중매체는 산업자본으로부터 광고비를 더 많이 받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신문사의 고상한 기사들, 방송사의 매혹적인 드라마들, 인터넷 사이트의 유익한 정보들은 모두 소비자를 유혹하는 일종의 미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첫 번째 구절을 보면 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의미의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이란 구체적 사용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객관적인 기능이 있으며, 아파트는 사람들의 주거를 편안하게 해주는 객관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객관적 기능 안에서 자동차는 아파트를 대신할 수 없겠지요. (중략) 반면 자신의 신분이나 부유함을 나타내는 차원이라면, 고급 자동차나 고급 아파트는 대체 가능하겠지요. (중략)

     보드라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너머서는 차원, 즉 “암시적 의미와 영역”에서 사물은 ‘기호(sign)’의 가치를 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호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증거로서, 보드리야르는 그 사례의 하나로 세탁기를 언급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가 “도구로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합니다.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그것은 세탁기라는 어떤 사물의 사용가치를 의미합니다. (중략) 하지만 보드라야르가 주목했던 것은 세탁기가 상징하는 ’행복, 위세 등의 요소‘라는 다른 가치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세탁기의 사용가치와 무관한 이런 가치를 ’기호‘라고 부릅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 집 안이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이미 산업자본주의가 열어 놓은 소비사회의 유혹에 포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산업 자본은 계속해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만약 소비자가 사용가치의 세계에 매몰됐다면 산업자본은 상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공장 가동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달성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상품에 기호를 기호가치를 새롭게 불어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산업자본은 이런 위기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대중매체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소비자들이 기호가치가 옮아간 새로운 상품을 계속 사들이니까요. 산업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이 아직 사용가치가 채 소멸되지 않은 수많은 상품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게 만드는 체계입니다.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2010/06/23 00:02 2010/06/2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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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2009공예트렌드페어







     ...  예링은 산업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이제 패션은 개인적 동기를 넘어 사회적 동기를 얻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때문에 예링은 패션을 개인적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학 층위에서 사유합니다. 벤야민이 인용한 패션에 대한 예링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 패션은 상류사회로부터 기원합니다. 상류사회는 스스로 하류사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새로운 패션이 필요했습니다. 둘째, 패션은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자마자 곧바로 소멸됩니다. 중간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게 되면, 특정한 패션은 상류사회를 중간계급으로부터 구별할 힘을 상실합니다. 셋째, 중간계급에게 패션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폭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스스로 상류계급을 지향하는 중간계급으로서는 상류계급이 택한 패션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중략)

     푹스*에 따르면 패션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합니다. 첫째, 패션은 예링이 지적했듯 상류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계급적인 구별을 두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패션은 계속 매출을 올려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션은 인간에게 에로티시즘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합니다. (중략)

     산업자본은 부단한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체계입니다. 상품을 생산하지 못 하거나 혹은 생산된 제품이 소비되지 않으면 산업자본의 흐름은 중단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상품의 생산이나 소비 차원 중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소비의 측면입니다.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자본이 필요한데, 그 자본은 기존 제품이 소비되어야 비로소 확보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볼 때 소비자의 소비 욕망을 부단하게 불러일으키는 일은 산업자본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이 걸린 결정적 문제가 되겠지요. 그래서 새로운 상품은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됩니다. 그것은 소비자 스스로 기존 상품이 낡은 것임을 깨닫게 하여 소비 욕망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됩니다. 새로운 상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바로 보들레르를 매혹했던 아케이드, 벤야민이 성찰했던 백화점, 현대의 잡지/신문 인터넷과 같은 대중매체 그리고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입니다.

    이제 패션과 관련되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세 번째 측면, 즉 에로티시즘과 패션과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중략) 피셔와 푹스를 통해 벤야민은 패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심화해 나갑니다.


     어느 세대든 바로 이전 세대의 패션을, 생각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철저한 황-최음제로서 체험한다. 이런 판단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초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패션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사랑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포함하며, 모든 패션 속에는 극히 무자비한 방식으로 성적 도착의 기미가 들어 있다. 모든 패션은 유기적인 것과 대립한다. 모든 패션은 살아 있는 육체를 무기물의 세계와 결합시킨다. 살아 있는 것에서 패션은 사체의 모든 권리를 감지한다. 무기적인 것에서 섹스어필을 느끼는 물신숭배야말로 패션의 생명의 핵이다.**


    (중략) 여기서 잠깐 옷과 성적 욕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한 통계에 따르면 나체촌에서는 성촉력이 거의 발생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노출이 심할수록 상대방에게 강한 성적 매혹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약간의 노출보다는 오히려 나체가 다 큰 매혹을 불러일으킨다고 추정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노출이 심한 경우 중요한 것은 노출된 몸 자체가 아니라, 몸의 특정 부분을 가린 작은 옷입니다. 밀월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가 몸속이 은은히 비치는 잠옷이나 속옷을 준비하는 것도 이런 이유겠지요. 그렇다면 완전한 나체보다는 작은 옷 혹은 비치는 옷처럼 은근한 노출이 왜 더 강한 성적 매력을 발산할까요?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욕구(need)와 욕망(desire) 구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단순히 부족한 것을 충족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욕망이란 욕구가 교묘하게 뒤틀려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성적인 경우에도 이처럼 욕구와 욕망의 단계를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적령기가 되면 동물이나 인간은 모두 이성에 대한 성적 욕구, 즉 성적 결핍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발정기 때 동물들은 허겁지겁 짝짓기를 수행하지요.

    그러나 인간은 성적 대상 앞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지만 상대방과 와인을 마시거나 애무를 하며 직접적인 성교를 뒤로 미룹니다. 이런 측면에서 욕망이란 욕구에 기생해서 작동하는 메타적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결여를 느낄 때 그것을 곧바로 충족시켜버리면, 욕망은 욕구보다 훨씬 커지게 되지요. 물론 욕망이 힘이 너무 강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때, 우리는 그것과 관련된 욕구를 충족시켜 그 욕망의 힘을 잠재워 버립니다.

    이제 옷이 성적 욕망과 관련하여 어떻게 적용하는지 생각해봅시다. 옷은 분명히 성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성적 욕구의 충족에는 분명 방해가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옷은 성적 욕망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지요. 성적 욕구의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더욱 강한 욕망을 발산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옷이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옷은 아예 성적 욕구, 즉 성적 결핍감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패션과 관련된 산업자본이 우리에게 개입하는 결정적인 대목입니다.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옷을 만든다면, 그것은 곧바로 매출로 이어지겠지요. (중략)

    이제 본격적으로 에로티시즘과 패션에 관련된 벤야민의 논의를 분석해봅시다. 그에게 패션이란 기본적으로 성적 페티시즘(fetishism)***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옷이란 장치는 성적 결핍감을 불러 일으키고 동시에 그 충족을 가로막지요. 이 때문에 옷은 성적 욕망을 강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수단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제는 수단으로서의 옷 자체에 자신의 성적 욕망을 모두 투사하는 것이지요.

    벤야민의 말대로 옷은 기본적으로 ‘무기물’,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옷 속의 몸은 ‘유기물’이고 살아 있지요. 성적 욕망이나 사랑은 모두 살아 있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중략) 사람들은 이제 무기물로서의 옷 자체를 오히려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중략) 벤야민의 복잡한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성이 어떤 패션을 연출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성적 욕망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현상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패션이 일종의 페티시즘, 혹은 성적 환상을 함축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중략)

     벤야민은 패션이 가진 패티시즘을 추적하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제기합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옷이 가진 성적 페티시즘은 원래 머리카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중략) 인간, 특히 여성의 몸 중 유행을 손쉽게 받아들이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머리카락입니다. 머리카락은 잘려서 미용실 바닥에 떨어지면 무기물로 변합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육체의 부분으로서 머리카락은 분명 살아 있는 유기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머리카락이 패션의 장소가 된다는 점입니다. 머리카락은 생명의 일부로서 계속 자라납니다. 이 때문에 머리카락은 다양한 유행을 계속해서 받아들이지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머리카락은 자라나고, 그러면 여성은 계속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에 최신 유행하는 패션을 입힐 수 있겠지요. 머리카락이 인간에게 최초의 옷이자 최후의 옷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체로 있다고 해도 칠흑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이 돌아앉은 여인의 등을 타고 흐른다면, 그 모습은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옷만큼이나 매혹적입니다. 도시 곳곳에 다양한 미용실을 생각해보면, 혹은 결혼식에서 신부의 화려한 머리장식을 생각해보면, 머리카락은 현재도 여전히 성적 페티시즘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략)

     만약 언젠가 산업자본이 붕괴되는 날이 온다면 패션에 대한 페티시즘도 소멸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머리카락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페티시즘은 훨씬 더 오랜 기간 존속하겠지요. ...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

* 에두라르트 폭스(Eduard Fuchs, 1870~ ? )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87a, 4)

*** 페티시즘(fetishism) : 인공물 또는 간단히 가공된 자연물에 주력(呪力)이 깃들인다고 믿고 이를 숭배하는 것. 영물숭배(靈物崇拜)라고도 한다. 숭배 대상은 동식물, 금석류(金石類), 주문(呪文), 주부(呪符), 주약(呪藥), 주구(呪具) 우상과 상징물 등이다. 주물을 나타내는 페티시(fetish)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이라는 뜻의 팍티티우스(factitius)에서 유래했으며, 직접적으로는 포르투갈어인 페티소(fetico;부적·주물이란 뜻)에서 파생했다. 포르투갈에서는 성자(聖者)의 유해나 유물 등을 페티소라 하여 숭배하는 민간신앙이 있었는데, 서아프리카 해안지역의 현지인들이 나무·돌·치아·손톱·나무조각·조가비 등을 모발 등으로 싸서 호부(護符)처럼 휴대하면서 숭배하는 것을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보고 이를 그들의 민간신앙에 관련시켜 페티소라 불렀던 것에 연유한다. 페티시즘(fetishism)은 심리학에서는 주로, 남성이 여성의 몸의 특정 부분이나 속옷·스타킹·구두 따위를 보거나 만지면서 성적 쾌감을 얻는 심리를 일컫기도 한다.







2010/06/16 20:14 2010/06/1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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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on EOS D60 / Canon EF 50mm / 경북 상주





   ...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고산지대에 사는 인간, 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에 사는 인간, 사막의 오아시스 근처에 사는 인간, 대도시에 사는 인간, 오지에 사는 인간. 분명히 인종은 동일한 인간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이 사는 공간의 흔적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의 지배력은 거대한 자연적 공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공간을 분할하여 만든 건축물과 같은 인위적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에를 들어 천주교 성당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부를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 중세풍의 인테리어 장식, 적절한 공간에 배치된 성스러운 촛불들.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누구나 성당이란 공간이 내뿜는 강렬한 힘을 느낍니다. 이런 공간에 적응해가며 천주교적 인간, 일종의 종교적 인간이 탄생하게 됩니다.

     공간이 지닌 지배력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상의 ‘권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던보이 이상은 소비문화가 작동하는 경성이란 도시가 키워낸 인물입니다. 때문에 시골에서 느꼈던 감정의 바탕에는 그에게 친숙한 도시에서의 삶과 정서가 놓여 있습니다. 즉 이상이 시골에서 권태라는 감정은 도시라는 공간과 시골이라는 공간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도시는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길들여 자기에게 맞는 인간 유형을 만들어낼까요? (중략)

     흔히 우리는 인간을 감정적이고 수동적이기보다 지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짐멜은 이런 통념을 비판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이란 대도시처럼 수많은 자극이 넘쳐나는 공간에 살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산물에 불과합니다.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짐멜의 논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세계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따라 구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략)

    분주한 삶을 영위하던 한 도시인이 어느 깊은 산골에 내려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도시인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그리고 비인격적인 인간관계에 신물이 나서 잠시 도시를 떠났습니다. 우리 주인공에게 시골의 첫인상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녹음으로 우겨진 깊은 산골, 그 사이로 조용히 흐르는 개울물, 친절하고 정 많은 시골사람들, 기름기 없고 소박한 시골의 정겨운 음식들. 아마 도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조릴지도 모릅니다. “내가 왜 지금까지 매연과 경쟁에 찌든 도시에 살았던 말인가? 한적하고 여유로운 시골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갈 만한 진정한 터전이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며 시골사람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인은 짐멜이 이야기한 것처럼 ‘답답함’을 느낍니다. 물론 이런 감정은 모던보이 이상이 시골에서 느꼈던 ‘권태’와도 유사합니다. 푸르른 자연 풍광은 이제 지루하기만 하고, 몇 명되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지나친 친절함은 간섭처럼 귀찮게 느껴지고, 자연에서 직접 채취해 요리한 야채 음식들은 어느 순간 입에 물립니다. 이제 우리 주인공은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떠나온 대도시를 그리워합니다. (중략)

     그런데 도시인은 시골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감정 이면에는 도시라는 공간이 만들어준 ‘자유’의 감정이 전제되어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시골보다 도시에서 더 자유롭다고 느낄까요? 이제 자유에 대한 짐멜 논문의 후반부 이야기를 경청해 봅시다.

     좀 더 정신적이고 세련된 의미에서 대도시인은 사소한 일들과 편견들에 얽매이는 소도시인들에 대해 ‘자유롭다’. 대도시와 같이 큰 집단이 가진 지적인 삶의 조건들이나 상호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라는 태도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개인의 자립성이 훼손되곤 하는 작은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라기보다는 대도시처럼 인구가 극도로 밀집한 곳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일 것이다. 이는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 공간의 협소성이야말로 정신적 거리를 가장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잘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대도시만큼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세시스, 2009) 중에서




........................
*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i life)>, 1903

* 게오르그 짐멜 :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학, 민족심리학, 철학 및 예술사를 공부했으며, 칸트 철학에 관한 연구로 1881년 박사학위를, 그리고 1884년에 '하빌리타치온(대학교수자격)'을 취득했다. 1885년부터 베를린 대학 철학과에서 사강사로 일하기 시작해 1901년에 부교수가 되었으나, 1914년이 되어서야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짐멜은 <사회분화론>, <도덕과학서설>, <역사철학의 문제들>, <돈의 철학>, <칸트>, <철학의 주요 문제들>, <괴테>, <칸트와 괴테>, <쇼펜하우어와 니체>, <사회학>, <사회학의 근본문제>, <렘브란트>를 비롯해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며,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사회학이나 (사회)심리학, 문학과 같은 경험과학, 철학, 인식론, 윤리학, 형이상학, 미학 등 실로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인간, 사회, 역사, 문화, 예술 등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 짐멜은 막스 베버나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거장에 견줄 만하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현상들에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사회의 심층적 구조와 본질을 읽어내는 짐멜의 지적 세계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아니, 단순한 매력 그 이상이다. 모더니티 담론과 포스트모더니티 담론은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거대한 정신세계에 회귀하면서 더욱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2010/06/15 15:29 2010/06/1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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